[역학의 후천(개벽) 소식 2강] 정역으로 본 개벽
강사 / 송재국 교수
정역: 후천개벽의 도래
정역은 후천개벽의 도래(다가옴)를 말하고 있습니다. 후천세계란 단순히 물리적인 세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인간세계는 신명적 차원의 경지를 갖고 있다고 전제할 때 논의가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하늘적 차원의 문제를 마음에 수용하지 않고는 완전한 위로를 받지 못하는 이른바 신명적 존재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언급된 하늘운행도수의 결과가 후천소식입니다. 정역에서는 후천세계소식을 이른바 천간지지라는 간지干支도수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간지도수
그렇다면 간지도수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것은 인간의 지혜가 열려서 머리 속으로 안출해낸 그런 도수가 아닙니다. 태초의 우주가 전개될 때 즉 하늘의 뜻이 출현할 때 그것을 드러낸 운행도수입니다. 바로 신묘적 차원의 도수입니다. 우리가 십간십이지를 음양으로 구분하면 다섯과 여섯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체體와 용用이 5와 6으로서 서로 합덕合德하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신묘적 차원, 곧 이치와 현상이 따로 놀지 않고 함께 노는 경지를 언급한 도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간지도수와 64괘
그럼 60간지가 주역의 64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주역은 왜 64괘의 순서를 가지고 있을까? 무릇 모든 생명의 계승과정에는 어머니의 태반 속에서 일정기간자라는 기간이 필요한 것이죠. 물론 어머니 태반 속에서는 아이라는 물체와 어머니라는 생명체가 공간적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적 시간은 공유하고 있습니다. 즉 따로따로의 생명을 갖고 있지만 어머니 태반 속에 있을 때는 시간을 함께 공유하기 때문에 그 시간을 ‘포태궁’이라 해서 64괘 중 4단계를 밝혀놓은 논리가 있습니다.
자식이 태어난 다음에는 엄마나 자식이나 각자의 생명원리를 전개시키기 때문에 엄마가 죽는다고 자식이 죽지는 않죠. 그러나 포태 안에 있을 때는 엄마가 생명을 잃으면 자식도 죽습니다. 그러니까 주역은 공간현상을 염두에 두고 논리를 전개시킨 것이기 때문에 포태라는 개별적인 공간인 4단계를 포함해서 64괘를 전개시켰다면, 시간의 원리를 얘기하는 정역에서는 원리도수 자체로써 충분하기 때문에 60단계로써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정역의 60간지도수와 주역의 64괘가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문제를 수용하는 심법
그렇다면 우리에게 초미의 관심거리는 ‘후천세계는 언제 오느냐? 어떤 모습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정리해 봤습니다. 세상에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일도 많이 있는 것이고 또 인간이 알 수 없는 일은 알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자식이 아무리 똑똑해도 부모의 경지를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는 데에 있어서 한계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하는 문제에 대해서 모른다고 무지는 아닌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을 짐작하고 수용하는 심법은 신앙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일상의 삶 자체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주역에서 우주사의 전개과정에 관한 역수변화원리에 대해서 언급한 것은 생각할 점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택화혁괘澤火革卦에 예언과 시사가 집중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혁革이라는 자체가 우주 도수의 변혁을 말하는 것입니다. 확 바뀌는 겁니다. 차원이 전환되는 것이지요. 단계적으로 천천히 순화해서 되는것은 혁이라 하지 않습니다.
주역: 택화혁괘
“택화혁괘澤火革卦”에는 여러 가지 상징적인 언급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기일내부己日乃孚 혁이신지革而信之”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기일己日의 ‘기己’는 간지도수에서 말하는 ‘천간의 기己’를 말합니다. ‘무기戊己’의 기己예요. 토土자리를 말하는데 ‘무戊5土’와 ‘기己10土’가 있지요.‘ 기己10土’는 이른바 씨와 열매로 봤을 때 열매, 완성을 뜻합니다. 그 ‘기일己日’이 혁革이 되어서 돌아오는 것(來)에 대해서 우리는 믿는다(信). 그것을 ‘오늘의 심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언급을 여기서 상징적으로 얘기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또 ‘래來’라고 하는 말은 ‘곤괘坤卦 상전彖傳’에도 그런 말이 있습니다. ‘래종유경來終有慶’. 우리말에‘ 나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중’이라는 말이‘ 이에 내乃’와 ‘마칠 종終’, 즉 ‘내종乃終’에서 나온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끝내 경사스러움이 있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치를 언급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미래적인 새로운 열매의 시대가 돌아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는 것을 ‘기일내부己日乃孚’라고 얘기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부孚’라고 하는 것은 새의 발이 그 아래에 알을 굴리고 있는 것을 상징한 글자예요. 그러니까 알이라는 것이 아직 생명이라고 할 수 없잖아요. 근데 그것을 계속 손톱 밑에서, 발톱 밑에서 굴리면 언젠가는 생명이 거기서 탄생한다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죠.
천지일월의 운행 모습을 보면서 미래의 어느 때부터는 뭔가 달라진다는 얘기를 납득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닭이 징후가 없는 알을 계속해서 품고 있으면 병아리라는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처럼 우리도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후천세계라는 새 생명의 축복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벽은 언제 오는가
제가 역학을 공부했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자꾸 물어요. “언제 개벽의 때가 옵니까?” 아주 진지하게 물어와요. 그래서 저도 진지하게 대답을 합니다.“ 이건 당신과 워낙 친하니까 이야기하는 건데 잘 들어요. 내일입니다.”라고 얘기합니다. 저는 정말 그렇게 믿습니다. ‘내일이 그날이다’라고 믿고 오늘을 살면 오늘의 삶의 내용이 전적으로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내일이 바로 그때임을 믿음으로 해서 오늘이 정말로 귀하고 성스럽고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후천세계에 대한 성인의 말씀은 언제나 바로 오늘, 선천의 지평에서 나의 일상으로 증거되지요. 사실 후천세계의 아름다운 기대감은 선천의 척박한 삶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날이 올 것을 믿는 사람은 오늘 비록 귀찮고 불편하더라도 내일을 준비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 동안에 잘못한 것이 많은 사람이 내일 개벽의 때가 와서 잘못한 사람이 심판받는다는 것을 믿게 된다면, 오늘 반성의 기회를 갖지않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미래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사건을 염두에 두고 오늘을 고민하고 대비하는 그런 존재가 인간입니다. 따라서 내일이 그날이라고 생각했을 때 잘못 살아온 사람은 반성하고 회개할 수 있는 원천적인 기회, 즉 구원의 기회가 주어져요. 또 열심히 살아온 사람은 기쁘게 그날을 대비하고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겠지요. 그래서 저는 언제나 ‘내일이 그날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후천개벽시대에 준비하는 자세
오늘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일은 돈이 들어가는 일이거나 힘든 일이거나 재미없는 일이거나하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성인의 말씀을 모시고 가르침을 섬기며 바르게 살아가면 충분합니다. 성인의 가르침이란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인 마음가짐과 예절바른 몸가짐으로 이웃과 더불어 겸허하게 살아가면 됩니다. 사실 이게 굉장히 간단한 것 같지만 어렵지요. 그러나 좀더 쉽게 말하면 짐승처럼 욕심내며 살지 말고, 도깨비처럼 거짓으로 살지 말고, 자기 기분대로 교만하게 살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말은 쉽지만 어렵지요. 그래서 주역을 중심으로 한 동양의 고전에서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다른 것이 아닙니다. 후천에 대비해서 선천에서 살아가야 될 올바른 몸짓을 가르쳐준 교과서입니다. 그것을 공자는 때에 알맞게 살아야 되는 법도로서 ‘시중지도時中之道’를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삶의 원리: 종교와 과학
그렇다면 지금 후천이 도래하는 인류사적인 징후를 한번 생각해 볼까요? 왜냐하면 지금 그러한 시대를 맞고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저는 인간 삶의 원리를 종교와 과학의 두 영역으로 구분해 봅니다. 인간의 살림살이를 이끌어가는 두 가지 생활 축이 종교와 과학이라면 선천 세계를 풍미한 기존의 종교도 분명히 한계성과 일방성과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내부적인 모순과 갈등의 극복과 정이 있지 않고서는 새로운 세계가 오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가 지난 2천년 세월 속에서 잘못된 것을 고백하자”고 한,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은 종교도 잘못된 것을 냉정하게 고백하자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제 남은 것은 과학적인 차원에서 가장 왜곡된 물질문제를 인류 전반에 강요한 것이 사회주의인데 그 문제를 고백할 날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후천을 소망하는 인간의 자세
그리고 우주의 생성원리가 성숙해서 어른 된 모습의 우주사가 열리는 개벽의 시대가 온다면 인류사회도 도덕적으로 성숙해서 후천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개벽과 후천은 동반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에 유념할 순서가 있습니다. 개벽의 문고리를 당기는 권능과 영광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역할임을 알아야 되지요.
개벽으로 가는 문은 하느님께서 친히 열어줄 것이기에 인간은 그때까지 조급하지 말고 참고 기다렸다가 하느님의 뒤를 따라 들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즉 부모를 앞설 수 없는 것이 자식이니까요. 근데 인간들 중에서는 먼저 나서는 교만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문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런 겁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꼭 생겨나지요. 그것이 부모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후천을 소망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훌륭한 자세는 하늘을 향해 따지거나 조르거나 투정하거나 원망하거나 하지 않고 처분을 기다릴 뿐 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잖아요. 그 지루한 것을 해소할 수 있는 문제는 자식에게 있는 것이지 부모에게 떠넘겨서는 안됩니다. 그러니까 그 지루한 기다림의 한계를 극복한자는 나중에 구원받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제외되는 것이죠. 결국 인간이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앙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에는 예법과 절차가 있어야합니다. 그래야만 하느님께서 기뻐하고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예절바른 기도는 다른 것이 아니지요. 진실한 마음으로 작게 하는 찬송입니다. 하느님의 귀는 오로지 진실한 기도만을 잘 듣습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소망하는 바의 크기에 따라 확성기에 매달려서 손뼉치고 발을 구르며 울부짖듯 찬송하지만 이는 하느님께 도리어 시끄러운 소음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기도 소리가 크면 클수록 바라는 소망을 크게 이룰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여 화려한 제사상에 기름진 제물을 올려놓고 천둥 같은 찬송으로 하느님을 몰아세우듯, 어떤 때는 막 협박하듯 기도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인간들은 빼어난 말솜씨와 값비싼 장식품만 있으면 하느님도 인간의 뜻대로 얼마든지 설득시키고 납득시키고 몰아갈 수 있다고 장담하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주변에 만연해 있는 이 허망한 찬송과 기도의 무례를 반성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아야 됩니다.
성인의 출현과 易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대행하는 성인은 인간으로 하여금 개벽의 때를 기다림에 있어서 지루하고 또 용기를 잃지 않도록 배려해 주셨어요. 바로 세상에 역易을 내려주신 겁니다. 易을 통해서 사람들이 ‘기다리면 되겠구나, 인간이 어떻게 살면 마땅하구나’ 할 수 있도록 분명한 메시지를 내려주셨다는 겁니다. 자식이 힘들고 어려운 세속의 냇물을 건너는데 확신을 갖고 기다릴 수 있도록, 인간사회의 험난하고 위험한 곳곳에 구제의 징검다리를 놓아주신 것이 바로 성인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기록된 것이 경전이구요.
하느님은 예수로 하여금 냇물을 건너기 쉬운 징검다리의 디딤돌이 되라고 인간 세속에 보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은 싯다르타로 하여금 물가에서 서성대는 중생들을 등에 업어 건네주는 일꾼 노릇하라고 내려보낸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비심이 크신 성인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저 언덕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강물을 건널 때에 물에 빠져 죽지 않도록 易이라는 생명의 징검다리를 놓아주신 것입니다.
후천개벽: 종교적 영역
보통 하늘의 문제를 말하면 오늘날 과학적인 사유를 하는 사람들은 천문과학으로 얘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후천개벽의 문제는 정치사회학적 문제도 아니며 천체물리학적 문제도 아닙니다. 신명적 차원의 우주사적 과정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는 종교적 영역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지도자들의 언행은 그대로 개벽의 역사로 기록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안내 메시지를 잘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뱀처럼 냉정하고 또 꽃처럼 정직해야 됩니다. 그런 후에야 산처럼 말하고 물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후천개벽을 보는 인간의 심법
지금 나의 몸짓 하나하나가 그대로 개벽의 소식을 전하는 발자국 소리가 된다는 사실에 우리 모두는 전율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죄없는 예수가 죄인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린 사건의 진실을 우리가 지금 냉정하게 봐야 됩니다. 고행의 끝에서 수잣타의 우유즙 공양을 받아먹고 남들은 모두 끝까지 목숨걸고 고행할 때 기운차게 우뚝 일어서서 ‘이게 아니야’ 하면서 깨달음을 얻고 행동하신 석가의 심법을 우리는 다시 공부해야 된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들이 진정 누구의 핏값으로, 누구의 걱정으로, 누구의 바람으로 이만큼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고 있는지 바로 이 땅바닥에 엎드려서, 반만년 조상님들의 육신으로 비옥해진 대지에 가슴팍을 붙이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지금 인간들이 자신의 생명적 근거인 하늘과 부모와 조상들의 음덕을 다시 생각해서 자기의 자각을 거치지 않은 자에게는 결코 복이 오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부모에게 불효한 자식이 어찌 지구 마을의 촌장노릇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나 를 낳아주신 부모 앞에 엎드려 자문자답하는 절절한 고해성사를 할 수 있을 때 오늘의 우리 상생의 모임은 개벽선포의 현장으로 기록되고 기억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종교와 과학의 자기고백
교황의 고백을 종교적 영역에서의 인류의 자기반성으로 볼 수 있다면 이제 남은 것은 이른바 과학적 사유의 한계에 대한 정직한 자기고백일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머지않아 있으리라고 봅니다.
한 시절 인간사회를 이끌어온 과학적 진화론의 왜곡된 이념이 탄생시킨 기형적인 이단아가 이른바 유물론에 근거한 과학적 공산주의를 추구한 사회주의 혁명이론입니다. 1세기 동안 인류역사를 전쟁과 파멸과 가난과 방황으로 몰고 간 공산주의는 이제 천하에 공증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사회주의 허상에 대한 근원적 성찰과 폐해에 대한 인류사적인 집단적 고백이 없음은 실로 유감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머지않아 이 문제에 대해서 책임있는 자들이 인류사에 나타나 자기비판과 자기극복 선언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고뇌의 자기 씻김굿, 인류의 자기참회의식이 열리는 날에 지구마을의 인민들은 후천을 맞이하기 위한 축제의 프로그램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역: 해괘解卦
인류문명의 시인 노릇을 한 우리가 인류문명의 열매를 위한 빗장을 열어야 될 책임적 존재라고 볼 때 구체적으로 우리 한민족에게 있어서 후천의 소식은 어떻게 나타날까? 이 문제에 대해서 제가 ‘주역 해괘解卦’를 통해서 설명해본 것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우리 민족과 더불어 생각해 봤습니다.‘ 해解’라는 것이 해소된다, 해결된다, 어려움이 풀린다, 우리의 소망이 풀어진다, 완성된다는 뜻으로 봤을 때 우리에게 절박한 소망이 뭘까? 민족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소망이 통일 아니겠어요.
통일의 성취를 위해 지도자가 해야 할 일은 과거 우리의 선배들이 지은 허물과 과오를 사면해야 됩니다. 그 죄를 그들에게 덮어씌우지 말고 오늘의 우리가 감당해야 되는 거예요. 오늘의 우리가 주체적으로 감당하고 계승하고 우리의 회개와 노력으로써 해결하자는 것이지요. 우리가 서로를 위무하고 반성하는 일. 진정한 화해와 통일의 도래는 남북의 지도자들이 공히 역사의 죄업을 자기 몫으로 고백하고 서로 흔쾌히 용서하는 데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난이 크면 영광도 크다고 하지요. 또 소망이 클수록 찬송을 작게 하라. 저는 늘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유달리 고난이 많았음은 큰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큰 병을 이겨내라고 하느님이 사랑으로 내려주신 면역항체백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민족이 진정 세계인류에게 후천의 양기를 선물하는 영광의 민족이고자 한다면 더욱 절제하고 겸손하고 노력해서 후천세계에 초대할 손님들을 위한 잔칫상을 부지런히 준비해야 하는게 아닐까요?
개벽사상: 종교의 보편적 기능
실로 개벽사상이란 인간의 미래적 기대치에 부응하고자 하는 종교가 갖추어야 하는 보편적 기능이고 장치이며 본질적 조건입니다. 실로 모든 종교가 예외없이 개벽적 성격의 교서를 갖고 있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과거와 미래를 다 생각하지만 본질은 미래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대해서 아무리 노력하고 애쓰고 판단하고 후회해도 달라질 것이 없어요. 그러나 미래는 내가 지금 어떻게 판단하고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거든요. 달라지는 미래적 삶에 대해서 메시지를 주는 것만이 우리에게 유의미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종교는 미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으면 본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천국, 불교가 얘기하는 정토사상, 정역의 후천사상 등은 종교의 본질인 개벽적 교설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제가 여기서 꼭 강조하고자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정역의 후천개벽사상이 여타의 종교가 제시하는 개벽적 성격의 교설과 다른 건 무엇이냐?
정역의 특징
기독교와 불교는 신앙의 성격이 외향적이거나 내향적으로 서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두 종교 모두 하느님과 당사자 개인 간의 일대일 관계가 성립하는 쌍무적 결단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자각하든, 나에게 자각이 이루어진 것을 수용하든 여기서 결판나는 겁니다.
그런데 정역의 개벽사상은 인간과 우주의 미래적 상황에 대해서 구체적인 도수를 제시함으로써 그 교설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인간의 이성적인 기반 위에서 확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울러 또 그 개벽을 분기점으로 해서 인간의 선천에서의 삶과 후천에서의 삶에 대한 도덕적 판결, 아주 엄격한 도덕적 판결이 내려지게 된다는 심판론을 천명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선후천을 구별하고 그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도수 출현으로 인간이 자신의 삶의 모습을 따져보면 수용할 수 있는 내용으로 설명돼 있고, 그러한 설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자는 반드시 머릿속이 아니라 도덕적 삶의 경험을 통해서만이 그 지위가 주어진다는 것을 아주 명쾌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선천 종교와 정역의 다른 점이 그것입니다.
기독교나 불교에서 얘기하는 수 많은 교의들은 상식적인 차원의, 과학적인 사유체계에서 도저히 감당되지 않는 게 너무나 많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부담이 없겠지만 더 많이 안 믿는 사람에게서는 얘기꺼리가 안되는게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정역은 이리저리 따져보면 받아들일 수 있는 공동의 보편적인, 이른바 철학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무리 글]
정역에서 제시하는 종교적인 이념과 개벽에 대한 설명은 인간 이성의 사유 속에서 이해되고 납득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실적이고 사건적입니다. 그래서 개벽의 상황 자체가 하나의 독립적인 권위를 스스로 가지고 있습니다.
정역의 개벽사상은 신명적 차원의 우주사를 설명하는 고차원적인 미래학이라는 점에서 개인의 호불호나 선택의 여부와 관계없이 정역의 체제와 질서를 이성적으로 공감하는 경우에 한해서는 그 역수 변혁의 이념을 수긍하고 신앙할 수밖에 없다는 절대적인 교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역에서 밝히는 후천의 세계는 정서적 이념이면서 실상이고, 개벽의 도래는 심정적 소망이면서 동시에 실제적 상황이 된다고 결론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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