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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1)성씨姓氏의 유래와 역사

by 태을핵랑 2018. 2. 28.

[한국의 성씨] (1)성씨姓氏의 유래와 역사

문화타임즈 최영철 기자 / 승인 2017.07.10 16:18

 

"뿌리에 대한 이해는 자존감과 성공의 원천"

"성씨 제도는 동이족으로부터 시작해!"

 

성씨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이유

 

인류는 오랜 시간을 거쳐 오면서 각기 다른 고유의 문화와 역사를 형성해 왔다. 

지역과 환경이 다른 만큼 매우 다양한 형태의 스펙트럼이 펼쳐지며 문명은 발전과 진화를 거듭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지역적 차별성과는 별개로 동서양 인류 문화는 공히 ‘성씨姓氏’ 단위의 뿌리 문화를 중심으로 면면히 흘러온 것 또한 사실이다. 

특히 동양권에서의 성씨 문화는 역사적 배경과 계통의 분화 측면에 있어 많은 사건과 이야기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한韓민족의 후손으로서 자신의 근본이자 뿌리인 성씨에 대해 그 기원과 연맥의 틀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저마다 자기 존재의 근원을 바로 알고 존중할 때 스스로의 삶에서 가치와 자존감을 높일 수 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당면한 현실의 제반 문제에 적절히 대응할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다가올 미래를 개척하고 문명 발전의 동력으로 삼는 기반도 뿌리를 제대로 확인하고 받드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다.

근래 한류 문화가 세계적 차원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는 현상도 알고 보면 한민족 고유의 심층 뿌리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민족 문화를 형성하고 대대로 이어 온 선조들의 지혜와 역사를 배우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성씨’ 문화를 바로 이해하는 것도 그러한 작업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본지에서는 <한국의 성씨>에 대한 기사를 연재함으로써 우리의 뿌리 문화에 대해 살펴보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그 첫 순서로 성씨의 의미와 기원에 대해 살펴보고, 우리나라 성씨의 시대별 변천사를 정리해 보기로 한다.

 

성姓은 출생의 계통, 씨氏는 본관의 개념

 

우리는 보통 성姓과 씨氏를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지만 양자는 그 개념이 엄연히 다르다. 문자학의 고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성姓 인지소생야人之所生也”라 하여 ‘성姓’이 출생의 계통을 표시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즉 성이란 모계시대에는 여계女系의 혈통을, 부계시대에는 남계男系의 혈통을 나타내는 표지라 할 수 있다. 또 『좌전左傳』(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천자건덕天子建德 인생이사성因生以賜姓(천자는 덕이 있는 자를 제후로 봉하고 그가 출생한 땅을 인연해서 성을 하사한다)”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는 천자가 유덕한 사람을 세워 제후로 삼을 때 그 조상의 출생지로써 성을 내려 주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개인이 갖는 성은 각자의 소속된 혈통을 분별하는 징표가 되는 것이다.

한편 동일한 혈통을 가진 자가 각지에 분산하게 될 때에 각기 분산된 일파를 구분하기 위한 표지가 필요하게 되는데, 이것이 ‘씨氏’의 개념이다. 

『좌전左傳』에는 앞서 인용한 구절에 이어 “조지토이명지씨胙之土而命之氏(거기에다가 영토로서의 땅을 나누어 주고 그 영토에 인연해서 씨를 명한다)”라 함으로써 ‘씨氏’는 지명에 의하여 명명命名됨을 말하고 있다. 

씨氏란 것은 성姓에서도 다시 소유한 지역을 기준으로 분별한 것이므로 우리의 ‘본관本貫’에 해당한다. 경주김씨, 전주이씨, 밀양박씨 등의 씨 자에는 존칭적인 의미도 담겨 있지만, 경주 전주 밀양 등 본관을 표시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정리하자면, 성姓은 ‘출생의 계통’을 나타내고, 씨氏는 ‘동일 혈통의 지역 분산 구분 표시’로서 우리의 본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인류 최고最古의 성씨는 강姜씨

 

인류 사회는 혈연에서 출발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이 때문에 원시 시대부터 씨족에 대한 의식이 매우 뚜렷했을 것이고, 그 씨족은 다른 씨족과 차별되는 각자의 명칭을 갖고 있었으며, 그 명칭은 문자를 사용한 뒤에 ‘성姓’이라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의 기록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5,700년 전 배달국 5세 태우의 환웅의 막내아들 태호복희씨가 풍산風山에서 살게 되어 성姓을 풍風으로 했으며, 이것이 인류 최초의 성씨가 되었다고 한다. 

풍씨는 이후 15대 만에 끊어지고 그 후손이 패佩, 관觀, 임任, 기己, 포庖, 이理, 사姒, 팽彭이라는 여덟 가지 성으로 나뉘어 살았다. 그 후에 염제신농씨가 강수姜水에 살면서 성을 강姜씨로 삼았는데, 이 ‘강姜씨가 곧 현존하는 인류 성씨의 기원’이라고 한다. 이는 한·중·일 3국의 성씨에 대한 기원을 자세히 밝혀 주는 문헌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성씨 제도는 동이족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성씨 기록의 변천사

 

성씨는 한 개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한국인은 자신의 성씨를 생명처럼 소중히 여긴다. 그렇다면 한국의 성씨에 대한 기록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 삼국 시대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등 우리나라의 사서에 의하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국가의 초기부터 성을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국호를 고구려라 했기 때문에 성을 고高씨라 하였으며 충신들에게 극克, 중실仲室, 소실小室 등의 성을 내렸다. 

백제는 시조 온조溫祖가 부여 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夫餘(扶餘)씨라고 하였다. 신라에서는 박朴, 석昔, 김金 3성의 전설이 전해오며 3세 유리왕 9년(32년)에 6부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 정鄭, 손孫, 최崔, 배裵, 설薛의 성을 사성賜姓하였다고 한다.

 

한편 중국의 여러 정사正史에도 삼국시대 국왕과 기타 인명을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의 경우 『한서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등에 시조 주몽과 고국천왕, 고국원왕, 광개토왕 등이 모두 성 없이 이름만 적혀 있으나, 남북조 시대의 『상서床書』에는 20세 장수왕의 이름을 고연高璉으로 표기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하였고 장수왕이 사신으로 보낸 사람들의 이름에도 모두 성을 사용하였다.

백제는 『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 등에 왕명이 모두 성 없이 이름만 기록되어 있으나, 『진서晉書』, 『남제서南齊書』 등에는 13세 근초고왕 때부터 27세 위덕왕 때까지 여餘씨로 기록하였으며, 『수서隋書』, 『당서唐書』에서는 30세 무왕부터 부여夫餘씨로 기록하고 있다.

신라에 대한 문헌으로는 『량서梁書』에서 23대 법흥왕을 모명태募名泰로 기록하였고, 『남사南史』와 『통전通典』에는 이것을 성모姓募 명태名泰로 기록하여 신라 왕실의 성을 모募씨로 표시하였다. 또한『북제서北齊書』에는 진흥왕을 김진흥金眞興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김金씨라는 성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더불어 7세기 이전에 기록된 진흥왕의 순수비, 진지왕 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술오작비, 진평왕 시대에 건립된 경주 남산의 신성비 등의 비문에서는 인명에 성을 사용하지 않고 소속부명(촌명村名)과 이름만 사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으로 볼 때 삼국의 초기에 우리 선조들은 성보다 본(촌명)을 먼저 썼다고 볼 수 있다. 본격적으로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를 보면 고구려는 장수왕, 백제는 근초고왕, 신라는 진흥왕 시대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성을 사용한 사람들은 왕실, 귀족, 사신들, 유학자, 무역을 하는 사람들에 국한되어 있었고 일반 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 않았다.

 

■ 고려 시대

고려 시대에 접어들어 태조 왕건은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세력들을 통합 관장하기 위해 전국의 군, 현 개편작업과 함께 성을 하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 성씨의 체계가 확립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거의 성을 쓰게 되었으나, 고려 문종文宗 9년(1055)에 성이 없는 사람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는 법령을 내린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성을 쓰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종 시기에 내린 이 법령은 우리나라에서 성이 보편화되어 일반 민중이 성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때문에 문종 이후의 사람을 시조로 하는 성씨가 많아졌다.

 

■ 조선 시대

조선 초기에 성은 양민에게까지도 보편화되었으나, 노비와 천민 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 수가 없었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노비를 비롯한 천민 층이 전체 국민의 대략 40%를 차지하였으니 성이 없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신분 해방과 상승으로 성이 없는 천민들 중에서 일부가 족보를 만들고 성씨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 1894년 갑오경장을 계기로 종래의 신분 계급이 타파된 것은 성의 일반화를 촉진시켰다. 

양반과 상민의 신분 격차가 없어지자 너나없이 양반임을 주장하게 되고 매관매직은 물론 족보까지 사고파는 행위도 성행하게 된다. 

 

■ 일제 강점기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지배하던 시기에는 모든 사람이 성씨를 갖도록 하는 민적법民籍法이 1909년에 시행되었다. 이 법이 적용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도록 제도화가 되었고,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때를 기회로 성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동 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 집안의 성씨를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이때부터 성씨의 종류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우리나라 성씨 사상 최대의 수난기는 일제 말기인 1939년 말부터 실시된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일본식 성명 강요) 제도라 할 수 있다. 창씨개명은 일제가 패망하고 1945년 9월부터 미군정이 개시되면서 1946년 10월 23일 법령 제122호로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이 공포됨으로써 그 시작부터 무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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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기자  taeul9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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