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 장군 동상, 종로네거리에 우뚝 서다
전봉준 장군은 고부군수 조병갑이 농민들로부터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고 재산을 갈취하는 데 항거해 1894년 3월 농민들을 이끌고 봉기했다.
이후 농민 자치기구인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해 개혁 활동을 펼치던 중 일본이 침략하자 이를 몰아내기 위해 같은 해 9월 2차 봉기해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우금치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한 전봉준 장군은 서울로 압송돼 전옥서(典獄署)에 수감됐는데, 이곳이 바로 종로 영풍문고 자리다.
<증산도 도전말씀으로 살펴 본, 전명숙 장군>
동학군의 패망(증산도 도전 1편 62장)
1그 뒤에 동학군은 11월 25일 원평 접전과 27일 태인 접전에서 연패하여 전군이 모두 흩어지니
2 이로부터 동학군이 전국에서 닥치는 대로 피살, 포살되니라.
3 증산께서 조선의 민중들에게 큰 시련과 좌절을 안겨 준 슬픈 겨울을 보내고 스물다섯 살의 봄을 맞으시니라.
4 그러나 따뜻한 봄날에 차가운 비극의 소식을 들으시니, 체포당한 김개남, 김덕명, 전명숙, 손화중, 최경선 등 동학의 거두들이 삼사십 대의 젊은 나이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하니라.
62:2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이 노래를) 못 부르게 했어요. (중략) 조부님이 동학군에 참여하신 기록이 있기 때문에 행여나 탄로 날까 봐서….”(안일완 증언)
62:4 김개남은 1894년 12월 3일(양력)에 전주에서 참수되어 효수되었고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환은 1895년 3월 29일에 교수형을 당하였다.
만고명장 전명숙의 공덕(증산도 도전 4편 11장)
전명숙(全明淑)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건지고 상민(常民)들의 천한 신분을 풀어 주고자 하여 모든 신명들이 이를 가상히 여겼느니라.
전명숙은 만고(萬古)의 명장(名將)이니라.
벼슬 없는 가난한 선비로 일어나 천하의 난을 동(動)케 한 자는 만고에 오직 전명숙 한 사람뿐이니라.
세상 사람이 전명숙의 힘을 많이 입었나니 1결(結) 80냥 하는 세금을 30냥으로 감하게 한 자가 전명숙이로다.
언론이라도 그의 이름을 해하지 말라.
http://v.entertain.media.daum.net/v/20180424062205333?f=m
종로 네거리에 '전봉준 장군' 동상
박용근 기자 입력 2018.04.18. 21:34
[경향신문] ㆍ국민성금 2억7천여만원 모여
ㆍ순국한 전옥서 터서 24일 제막
동학농민군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 장군 동상(사진)이 서울 종로에 들어선다.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이사장 이이화)는 24일 오전 11시 종로 네거리 영풍문고 앞에서 전봉준 장군 동상 제막식을 갖는다고 18일 밝혔다.
2017년 동상건립위원회가 창립된 지 1년 만이다. 동상건립위원회는 국내 처음으로 동상건립 기금 2억7000여만원을 국민성금으로 모았다. 동상은 충북대 김수현 명예교수가 제작했다.
종로에 전봉준 장군 동상이 들어설 수 있게 된 것은 지난 2016년 8월 박원순 서울시장이 전주를 방문해 전봉준 장군 순국터인 서울에 동상을 건립하자는 동학혁명기념사업 관계자의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가시화됐다.
박 시장은 순국 장소였던 옛 전옥서(典獄署) 터에 서울시유지가 있다는 사실을 보고받고 지난해 4월 서울시 법인으로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를 설립했다.
옛 전옥서 자리가 종로 네거리 영풍문고 앞이다.
제작이 완료된 동상은 서울시 공공미술위원회를 통과해 현재 건립공사가 진행 중이다.
<박용근 기자 yk21@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