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씨 | 김씨金氏
김씨의 유래
우리나라에서 김씨는 전체 인구의 5분의 1인 992만 6000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김수로왕계의 김해 김씨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김알지계의 신라 김씨 계통이다.
그 외에 우리나라에 귀화한 김씨도 있다. 김씨의 본관 별 인구 수를 보면 김해 김씨가 445만 6천 명으로 가장 많고, 경주 김씨가 180만 명, 광산 김씨가 92만 6천 명, 김녕 김씨가 57만 7천 명, 안동 김씨가 51만 9천 명이다.
그 외에도 의성 김씨(28만 7천 명), 강릉 김씨(17만 9천 명), 선산 김씨(13만 8천 명) 등이 있다(2015년 인구센서스, 통계청).
사실 김씨라는 한자 성을 사용하는 인구는 중국과 만주 등 동아시아 지역에 매우 폭넓게 분포하고 있다. 금金나라의 金이라든지, 중국 성씨 중에 金씨는 우리나라의 김씨와 깊은 연관이 있다. 김씨는 고려 때까지 금金씨로 불렸는데, 음양오행에 따라 이씨 조선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불길한 소문을 염두에 둔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쇠 금이 아닌, 성 김으로 바꿔 불렀다는 설이 있다.
설화로 보는 김씨의 유래
김씨의 탄생 설화는 잘 알려진 대로 『삼국사기』의 김알지 설화(AD 65년)와 『삼국유사』의 김수로 설화(AD 42년)가 있다. 그중 김수로왕 탄생 설화는 다음과 같다.
“후한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 3월 상사일에 구지봉龜旨峰에 이상한 소리로 부르는 기척이 있어 구간九干 등 수백 명의 사람이 모여들었다. (중략) 구간 등이 구지가龜旨歌를 부르고 춤을 추자, 하늘에서 자색 줄이 드리워 땅에 닿았는데, 줄 끝에는 붉은 폭에 금합金合이 싸여 있어 열어 보니 해와 같이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다음 날 새벽에 알 6개가 화하여 사내아이로 되었는데 용모가 매우 깨끗하였다. 이내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이 축하하는 절을 하고 공경을 다하였다.
그달 보름에 모두 왕위에 올랐다.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휘諱를 수로首露라 하고 혹은 수릉首陵이라 하였는데, 수로는 대가락大駕洛의 왕이 되고 나머지 5인도 각기 5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린 김알지 설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65년(탈해왕 9년) 8월 4일 왕이 밤에 금성金城(경주) 서쪽 시림始林 숲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다.
호공이 시림 속에서 큰 광명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자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뻗쳤는데, 구름 가운데 황금 궤가 나무 끝에 걸려 있고 그 빛이 궤에서 나오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어 왕께 아뢰었다.
왕이 숲에 가서 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 이는 박혁거세의 옛 일과 같으므로, 박혁거세를 알지閼智(지혜가 뛰어나 이름을 ‘알지’라고도 함)라 한 선례에 따라 이름 지었다.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이라 하였다. 아기를 안고 대궐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며 기뻐하였다. 왕이 좋은 날을 받아 태자로 책봉하니 그가 곧 김알지이다. 그리고 시림도 계림鷄林으로 고쳐 국호로 삼았다.”
이렇듯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실린 김씨의 유래를 보면, 그 시조는 하늘에서 내려온 금궤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금석문金石文이 전하는 김씨의 뿌리
우리는 금석문을 통해 김씨의 유래에 대해 설화보다 더 현실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하나가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金仁問의 비문과 추사 김정희가 밝혔다가 200년이 지난 1961년에 우연하게 발견된 문무왕 비문이 그것이다.
먼저 『삼국사기』에 전하는 김유신 비문에는 ‘김유신이 헌원지예軒轅之裔요 소호지윤小昊之胤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김인문의 비문에도 나와 있다.
또한 중국에서 발견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1954년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 동쪽 교외 궈자탄郭家灘에서 출토된 ‘김씨 비문’에는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금천少昊金天씨이다.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의 성씨를 받게 된 세조世祖이시다. (중략) 먼 조상은 일제日磾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을 하였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황제께서) 그를 발탁해 시중과 상시에 임명하고 투정후秺亭侯(투후秺侯)에 봉하시니, 7대에 걸쳐 벼슬하매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중략) 한이 난리가 나서 괴로움에 처하자 멀리 피해 요동遼東에 살게 되었다.
(중략) 지금 다시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듯 번성했다(이하 생략)”라고 적혀 있다. 특히 다시 발견된 문무왕 비문의 내용은 더욱 구체적이다.
그 비문에는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5행),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신라로 내려왔고’(6행)라는 구절이 있다.
추사 김정희는 문무왕의 15대조 성한왕을 신라 김씨의 시조 대보공 김알지로 추정했다. 투후 김일제는 한 무제 때, 흉노(훈족) 휴도왕의 태자였다가 곽거병에게 포로로 잡힌 사람이다. 종합하면 신라의 김씨들은 자신들의 내력이 멀리는 소호금천씨(동이족의 성왕, BCE 2598∼BCE 2514)로부터 시작했고 가까이는 흉노의 왕자 김일제에서 김알지로 이어진다고 믿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씨가 많은 이유에 대해 “김씨가 역사에 등장한 지 오래되어서”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김씨보다 먼저 등장한 박朴씨가 김씨보다 훨씬 적은 사실에서 이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김씨 이전에 고구려·백제의 왕족과 귀족들도 성을 사용했다. 고구려의 왕실의 고高씨와 백제의 여덟 성姓은 현대까지 이어져 오지 못했다.
고려와 조선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김씨 성이 유독 많은 이유를 알 수 있다. 즉 적잖은 수의 귀화인歸化人이 김씨 성을 취한 것이다.
일본에서 귀화한 김씨들
김해 김씨 중에는 임진왜란 당시 귀순한 일본군 장수 김충선金忠善을 시조로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을 사성賜姓 김해 김씨 혹은 우록友鹿 김씨라고 한다.
원래 이름이 사야가沙也可인 김충선은 가토 기요마사의 부장副將으로 참전했다. 유교적 소양을 갖고 있던 그는 조선의 문물을 흠모해 휘하 병졸 3000명을 데리고 조선에 투항했다. 이후 그는 경주 전투에서 공을 세워 선조로부터 김해를 본관으로 하는 김씨 성과 ‘충선忠善’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자헌대부(資憲大夫·정2품 하) 품계를 받았다. 임진왜란 때 귀순한 일본인으로는 김상의金尙義라는 사람도 있다(일본 성명은 전해지지 않음). 김충선이나 김상의에 앞서 귀화한 일본계 김씨들도 있다. 조선 세종 때 귀화한 김호심파金好心波, 성종 때 귀화한 김삼보라사야문金三甫羅沙也文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이름을 보면 일본에서 쓰던 이름에 김씨 성을 붙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후손도 적지 않겠지만, 일본계 귀화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은 김충선을 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뿐이다.
중국에서 귀화한 김씨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귀화한 김씨 중 가장 많은 것은 여진족에 뿌리를 둔 김씨다. 육진六鎭 개척 당시 세종은 귀화한 여진족 수백 명에게 김씨 성을 하사했다.
귀순 여진족들에게 김씨 성을 내린 것은 12세기 여진족 아골타가 세운 금金나라와 관련이 있다. 아골타의 조상은 고려에서 건너간 김함보金函普라고 한다.
어쩌면 여진족들이 귀화하기 이전에 김씨 혹은 그에 해당하는 여진 성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현재 여진족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하나도 없다.
여진족을 조상으로 하는 김씨가 없는 것은 후대에 자손들이 모화사상慕華思想 때문에 그들의 출신을 감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우리 주변의 김씨들 중에는 그들의 후예가 적지 않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여진족이 잡거雜居하다가 점차 조선의 영토로 편입된 함경도와 평안도에 유난히 경주 김씨 집성촌集姓村이 많다는 사실이다.
영양英陽 김씨와 태원太原 김씨는 당나라에서 귀화한 김씨다.
조선 초기에 명나라에서 귀화해 온 김씨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나오는 김완귀金完貴, 김용金龍, 김춘산金春山, 김남길金南吉, 김길장金吉狀, 김성金聲, 김융金隆, 김준金俊, 김귀金貴 등이 그들이다.
북한의 김씨
1960년대 어느 출판사에서 펴낸 『한국인의 족보』라는 책에는 일제 시대의 자료를 바탕으로 지역별 집성촌 호수戶數 기록이 나와 있다. 이에 의하면 함경도 지역에 100호가 넘는 경주 김씨 집성촌이 여러 곳 있었다. 집성촌은 대개 일개 면面에 특정 성씨가 수십 호인 것이 보통인데, 함남 영흥군 억기면咸南 永興郡 憶岐面의 경주 김씨 집성촌은 200호가 넘었다. 함경북도 명천군明川郡 일원에는 260여 호가 있었다. 평안북도 의주義州와 벽동碧潼에도 경주 김씨가 많이 거주했다. 경주 김씨의 본관이 있
는 영남권 못지않은 집성촌이 함경도와 평안도에 많았다. 참고로 북한 김일성金日成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알려져 있다. 이 사실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김정일이 “나는 전주 김씨인데, 내 시조 묘소가 전라도에 있다 하니 남조선 방문하면 참배하겠다.”고 해서 알려졌다. 전주 김씨의 시조는 고려 고종 때 재상을 지낸 김태서金台瑞다. 그의 묘는 전북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 자락에 있다고 한다.
출처: 증산도 월간개벽 http://www.greatop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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