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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코드/성씨,나의뿌리

한국인의 성씨/ 안동安東 김씨

by 태을핵랑 2017. 10. 20.

한국인의 성씨/ 안동安東 김씨

 

안동安東 김씨


현재 안동安東 김씨에는 뿌리가 다른 두 개의 성관이 존재한다. 선先(또는 구舊) 안동 김씨와 후後(또는 신新) 안동 김씨가 그것이다. 선 안동 김씨는 경순왕의 손자인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하고, 삼별초의 난과 왜구를 토평하여 상락군 개국공신에 봉해진 김방경金方慶을 중시조로 하는 성관이다.

반면 후 안동 김씨는 안동의 성주로서 견훤의 후백제군을 물리치고 태조 왕건에게 귀부하여 개국공신 삼광태사에 오른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두 안동 김씨는 2015년 통계청 조사에서 519,719명으로 조사되었다

선(구)·후(신) 안동 김씨로의 분파와 인구
선(구) 안동 김씨의 중시조 김방경金方慶의 아들과 손자들이 고려 말에 크게 이름을 떨쳤으며, 조선 전기에는 김영후金永煦의 후손들이 크게 세력을 떨쳤다.

현재 15개 파가 존재한다. 그중 김익달金益達의 제학공파, 김사렴金士廉의 안렴사공파, 김사형金士衡의 익원공파가 60∼70%를 차지한다.

후(신) 안동 김씨는 조선 중기 김극효金克孝의 아들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 형제가 정승이 되면서 가문이 크게 번성했다. 이후 김조순金祖淳의 딸이 순조비가 되면서 후 안동김씨의 막강한 세도정치가 펼쳐졌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47,70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안동 김씨의 시조 출생 연대나 안동을 본관으로 삼은 시기를 보면 김선평을 시조로 하는 후(신) 안동 김씨가 앞서 있다. 그런데 시기가 앞선 김선평계의 안동 김씨를 후(신) 안동 김씨로 쓰고, 뒤에 안동을 본관을 정한 김숙승계의 안동 김씨를 선(구) 안동 김씨로 쓰고 있다. 이는 선(구) 안동 김씨가 고려 말과 조선 전기·중기에 세력을 떨쳤고, 후(신) 안동 김씨가 조선 중기·후기에 세력을 떨쳤기 때문으로 보인다.

 

 

선(구) 안동 김씨의 인물
중시조 김방경 이후 다섯 아들과 손자들이 모두 고려와 조선의 명신록名臣錄에 오를 정도로 이름을 떨쳐 명문 가문으로 자리 잡았다.

장남 선은 전법판서를 거쳐 상호군上護軍에 이르렀고, 차남 흔은 삼중대광 도첨의사사, 셋째 순恂은 삼중대광 상락군, 넷째 논은 천호위 상장군이 되었다.

그중 순의 아들 중에서는 조적의 난을 평정한 후 좌정승으로 상락부원군이 된 영돈永敦과 우정승인 영후永煦가 유명했다. 영돈의 손자 대에서 직제학지공조사사에 오른 김익달에서 제학공파가, 영후의 손자로 안렴사에 오른 김사렴에서 안렴사공파가,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이 된 김사형에서 익원공파가 생겨났다. 이들을 제·안·익 3파라고 하며, 그 외에도 도평의공파나 문온공파 등 총 15개 파가 있다.

김사렴과 김사형은 형제지간이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김사렴은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더불어 고려 말 충신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신돈의 전횡을 탄핵하였으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좌사간左司諫 제수를 마다하고 청주 근방(청원)에 은거하였다. 반면 동생인 익원공 김사형은 조선 개국에 적극 가담하여 일등 공신이 되었다. 일등 공신이 된 후 좌의정에 오른 김사형이 형의 좌사간 벼슬 제수를 전하려 청주에 도착했으나 만나지 않고, 더 깊은 도산(지금의 안동)에 은거하였다.

선(구) 안동 김씨에서는 무인이 많이 배출되었다. 9명의 역대 충무공(이순신 등) 중 2명이 나왔으며, 삼도수군통제사만도 10명이나 배출되었다.

2명의 충무공 중 하나가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을 이끈 김시민金時敏 장군이며, 다른 한 명은 광해군 때 훈련대장으로 강홍립과 함께 후금(청) 정벌에 나섰다가 전사한 김응하金應河 장군이다. 그 외 원주목사로 원주성을 사수하다 전사한 김제갑金悌甲이 있으며, 병자호란 때 성천부사로 있다가 순절한 김언金言도 있다.

이처럼 조선 전기와 중기에 승승장구하던 선(구) 안동 김씨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인조 때에 김자점金自點 역모죄로 처형되면서부터이다. 이로 인해 선(구) 안동 김씨의 위세는 크게 위축되었다.

근대 이후 선(구) 안동 김씨의 인물로는 백범 김구金九가 있다. 그 외 선(구) 안동 김씨의 인물로는 충남도지사를 역임한 김학응, 전두환 정권의 경제정책 입안에 공을 세운 김재익 경제수석, 서예가 김사달 박사, 동원그룹의 김재철 회장 등이 있다.

후(신) 안동 김씨의 인물
후(신) 안동 김씨는 조선 중기 이후 김상용金尙容과 김상헌金尙憲 대에서 크게 일어났는데, 그중 청음淸陰 김상헌의 후손들이 조선 후기에 세도정치로 위세를 떨쳤다.

후(신) 안동 김씨를 가리켜 “후(신) 안동 김씨의 곳간엔 금관자金貫子(관자는 갓끈을 고정하는 도구로 금관자라는 것은 높은 벼슬을 가리키는 말)가 서 말”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이다. 곳간은 6명의 창昌 자 돌림을 창고에 빗댄 말이다.

첫째 김창집金昌集의 후손에서는 왕비 3명·영의정 4명·좌의정 3명·판서 13명이 배출되었으며, 둘째 김창협金昌協의 집안에서는 부자父子 대제학이 나왔다. 그 후손들이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조판서 김수근의 두 아들(김병학·김병국)은 모두 영의정이 되었다. 셋째 김창흡金昌翕의 집안에서는 뛰어난 문장가들이 나왔으며, 벼슬은 우의정(김달순)과 공조판서(김선근)가 나왔다. 넷째 김창업金昌業의 집안에서는 진경산수화가 김윤겸, 형조참판 김양행, 병조판서 김이익 등이 나왔다.

다섯째 김창즙金昌緝의 집안을 보면, 김창즙은 왕자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며, 공조판서 김용겸이 나왔다. 여섯째 김창립金昌立의 집안에서는 공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낸 김학순, 공조참판 김연근, 공주의 부마이며 창녕위로 봉해진 김병주, 형조판서 김석진 등이 나왔다. 조선 시대에 정승이 15명(영의정 8명·좌의정 4명·우의정 3명), 판서가 50명 이상이나 나왔다.

그 외 후(신) 안동 김씨의 주요 인물을 보면 방랑시인 김병연金炳淵(김삿갓),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金玉均,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있으며, 독립운동가인 김가진金嘉鎭(충청도 관찰사,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 김학규金學奎(광복군 제3지대장), 김복한金福漢(파리강화회의 독립청원, 옥사) 등이 있다.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안경전,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사, 2012
2013년 6월호 월간조선

〈참고사이트〉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통계청 홈페이지
위키 백과

 

 

출처: 증산도 월간개벽 http://www.greatop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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