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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코드347

한국의 성씨 / 감씨甘氏 한국의 성씨 / 감씨甘氏 회산檜山(창원) 감甘씨 시조 감규甘揆 감씨는 중국 주나라 무왕의 셋째 아들 숙대叔帶가 감후甘侯에 봉해지고 그 곳을 식읍으로 하사받은 후, 그 땅 이름을 성으로 삼은 데서 유래되었다. 우리나라 감씨의 시조는 감규甘揆이다. 감규는 원나라 한림원翰林院 태학사太學士로서 1351년(충정왕 3년) 원나라에 와 있었던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배종陪從(지체 높은 사람을 모심)하고 고려에 들어와 우리나라에 정착하였다고 하며, 고려조에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부총리 급)에 올랐다. 후에 연릉군延陵君(황해도 개풍군 지역)에 봉해졌으며 15세 후손인 감수화甘受和에 이르기까지 연릉을 본관으로 삼았다. 그런데 16세손 감철甘喆이 북벌을 간諫하여 중지하게 한 공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2018. 7. 2.
한국의 성씨 / 국씨鞠氏 한국의 성씨 / 국씨鞠氏 담양潭陽 국鞠씨 시조 국주鞠周 국주는 송나라의 공경대부公卿大夫(三公·九卿·大夫를 말하는데, 나중에는 ‘벼슬이 높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였는데, 금나라가 송나라의 황제였던 흠종欽宗을 납치해 간 정란이 발생하자, 이 난을 피해 1128년(고려 인종 6년)에 고려에 입국하여 귀화하였다. 국주는 고려에 입국하자마자 인종을 배알하고 군신의 예를 취하였는데 인종이 크게 기뻐하면서 국주에게 감정관鑑定官을 제수하여 고려 조정에 출사시켰다. 그리고 당시 중원의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던 금나라가 송나라를 제압하고 고려에게 군신의 관계로 강요하며 많은 공물을 요구하였는데, 인종은 국주를 금국봉사金國奉使로 임명하여 금나라의 요구에 외교적으로 대처하게 하였다. 국주는 왕명을 받고 여러 번 금.. 2018. 7. 2.
한국의 성씨 / 위씨魏氏 한국의 성씨 / 위씨魏氏 장흥長興 위魏씨 시조 위경魏鏡 당나라 관서 지방의 홍농弘農사람인 위경魏鏡은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이 당나라에 도예지사道藝之士를 청했을 때, 서기 638년(선덕여왕 7) 당나라 한림학사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위경은 신라에서 문하습비후門下拾非候·아찬阿飡(신라의 17관등 중 6번째)·상서시중尙書侍中(상서성의 으뜸 벼슬)을 역임하고 고려 때 회주군懷州君(회주는 장흥의 옛 지명)에 추봉해졌기에 후손들이 관향을 장흥으로 하였다. 그러나 문헌을 잃어 세계를 잘 알 수 없자, 고려 초 대각간시중大角干侍中을 지낸 위창주魏菖珠를 중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 왔다. 우리나라 정사에 나오는 최초의 위씨는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집 「삼대목(三代目)」을 엮었다는 신라의 위홍魏弘이다. 그는 오늘날 수.. 2018. 7. 2.
한국의 성씨 / 옥천玉川(순창淳昌) 옹씨邕氏 한국의 성씨 / 옥천玉川(순창淳昌) 옹씨邕氏 옹씨는 단일 본本 옹邕 자는 ‘막다’, ‘화락和樂하다’ 등의 뜻이 있다. 우리나라 옹씨는 옥천玉川 옹씨와 순창淳昌 옹씨의 두 본관이 있다. 옹씨 본래의 본관은 옥천이다. 그러나 1930년 조선총독부의 국세 조사에서 본관을 기록할 때, 일족 중의 일부가 옥천에서 바뀐 지명인 순창으로 본관을 등록함으로써, 순창 옹씨가 생겨났다고 한다. 결국 옥천, 순창 두 본관은 동일한 본관이며, 족보에서도 두 본관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기재하고 있다. 한편 거창居昌 옹씨로 알려진 사람들도 1930년의 조사에서 당시의 거주지를 본관으로 신고함으로써 나타났다고 한다. 순창은 전라북도 남쪽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려 때에는 순창현淳昌縣이 되어 남원부南原府에 속하였다가, 1314년.. 2018. 7.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