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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11

[보천교 학술대회 후기]-민족정신의 산실, 독립운동의 메카 보천교 [보천교 학술대회 후기]-민족정신의 산실, 독립운동의 메카 보천교 [행사 후기] 민족정신의 산실, 독립운동의 메카 보천교 김만섭 기자 / 승인 2017.11.16. 17:48 2017년 11월 15일, 자칫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듯 했던 보천교가 '일제 강점기 민족운동의 산실 보천교의 재발견' 이라는 주제의 학술대회를 통해 부활의 시간을 맞이했다. 조선총독부 공식 보고 문서와 미 총영사인 밀러의 본국 보고서 상에 신도 수 추산 600만으로 알려졌던 보천교는 그 동안의 오명의 늪에서 다시 깨어나 “민족운동의 산실, 독립운동의 메카”로 우리의 역사 속에 다시 들어왔다.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이번 학술대회는 유성엽의원실(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이 주최, 상생문화연구소가 주관하고 STB.. 2017. 11. 20.
보천교 간부들,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 보천교 간부들,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 민족종교를 사이비종교로... 일제의 치밀한 전략이었다 기사입력 2017-11-20 08:39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산실 보천교 재발견' 학술대회 [오마이뉴스 조우성 기자] ▲ 한때 600만 신도에 달했던 보천교는 독립운동의 자금줄이며 인적 산실이었다. 어릴 적에 동학접주였던 아버지 차치구를 따라 동학혁명에 가담했던 보천교 교주 차경석은 일제에 의해 '갑종 요시찰인'으로 분류되어 철저한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심한 압박속에서도 그는 상해임정과 독립단체들에게 아낌없는 재정.인적 지원을 하였고, 짓밟힌 한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고 망해버린 나라를 새롭게 재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그는 항일투쟁과 민족독립,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일생을 불태운 시대의 영웅이었다. ⓒ.. 2017. 11. 20.
일제와 친일언론들, 보천교와 민족종교를 사이비종교로 매도 일제와 친일언론들, 보천교와 민족종교를 사이비종교로 매도 일제는 1915년 8월에 조선총독부령으로 포교규칙을 선포하여 독립활동에 적극적인 민족종교를 유사종교단체로 분류하여 건전하지 못한 반사회적집단, 미신집단, 사이비종교단체로 규정했다. 언론도 일본 총독부의 선전도구로 전락해 보천교와 민족종교를 유사종교 및 사교와 같은 사회악의 존재로 취급하였다. 신문은 보천교를 비윤리적 반사회적 사상과 가르침을 펴는 미신, 사교집단으로 매도했다. 일제는 민족종교를 독립운동이나 민족운동과 같은 정치적 변혁을 꾀한다고 판단해 민중과 격리시키고 통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이비종교단체라는 올가미를 씌워 종교가 아닌 일반결사단체로 취급하여 '보안법', '집회취체에 관한 건'을 적용시켰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 2017. 11. 20.
보천교와 민족종교를 일제가 강제 해산시킨거 아세요? 보천교와 민족종교를 일제가 강제 해산시킨거 아세요? 일제, 유사종교해산령 만들어 보천교와 민족종교 강제 해산시켜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민족말살정책을 펼쳤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일제는 한국의 민족성, 독립 등을 풍기는 모든 단체는 철저하게 해체시켰습니다. 그 정점은 1936년에 내린 '유사종교 해산령'입니다. 두 사람 이상의 집회가 금지되고, 1원 이상의 금전수합 역시 금지되었습니다. 유사종교 해산령에 따라 각도 경찰국은 종교시설물을 폐쇄시키고, 종교지도자들을 검거하는 등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하였습니다. 1936년 6월 6일, 일경이 보천교 간부 24명을 연행하였고, 이틀 후에는 경찰 수십명이 밀어닥쳐 본소 성전의 제기와 일월상, 제단마저 전부 뜯어갔습니다. 6월 15일.. 2017. 1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