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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코드/환단고기桓檀古記

환단고기 북콘서트 광주편 프롤로그- 동서양 문화원전의 성립과 보정작업의 중요성

by 태을핵랑 2018. 3. 14.

환단고기 북콘서트 광주편 프롤로그- 동서양 문화원전의 성립과 보정작업의 중요성


환단고기 위서론 시비의 실상

환단고기진서론 변증

위서논쟁의 핵심과 그 진실

환단고기의 진정한 가치를 밝히는 새로운 발걸음

 

동서양 문화원전의 성립과 보정작업의 중요성.

환단고기 북콘서트 광주편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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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위서론 시비의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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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한민족사의 놀라운 진실.

지금, 동북아 역사변혁의 중심에 놓인 한반도.

그 주인공인 남북의 82백만 동포는 한민족 역사 운명의 급박한 전환의 기로, 즉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 서 있다.

오늘 우리 민족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첫째 과제는 잃어버린 역사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이를 복원하는 일이다.

이것은 한국인이 모든 이념과 종교를 초월해 통일문화 시대를 여는 역사과업의 대전제이다.

동북아 역사의 진실, 대한민국과 중국, 일본의 역사 출발점인 창세 역사의 진실을 밝혀주는 한 역사서가 한국의 지성사에 그 얼굴을 드러냈다.

1980년대 초 역사학계와 문화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그 사서는 바로 환단고기!

환단고기 왜 그렇게 대중들의 이목을 그토록 집중시키면서 한국사회와 지구촌 역사학계에 크나큰 충격과 파문을 일으키는 것일까...

환단고기는 지금부터 9,200여 년 전 저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의 한가운데 우뚝 선 인류사의 첫 나라, 동서 인류문명의 고향, 환국의 열 두 나라가 세워졌는데, 그 국통을 계승한 동방의 배달과 단군조선 그리고 북부여와 고구려를 지나 대진국과 고려에 이르기까지 잃어버린 한민족 상고사의 놀라운 진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위서론을 제기한 강단사학, 그러나 중국의 중화사관과 일본의 식민사관이라는 잘못된 노예사관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오늘의 강단 사학계는, 인류 창세 역사와 한민족 시원 역사의 그 경이로운 진실을 전하는 환단고기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 위서론 시비로 맞불을 지르고 나섰다.

이 나라 강단 사학계는 환단고기라면 일단 위서론이라는 칼부터 빼어들고 본다. 진실의 문 안으로 경건하게 들어가려 하지 않고 그저 진실의 언저리에서 기웃거리면서 몇몇 흠을 찾아 끝없이 시비하고 고개를 돌리는 것이다.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원본의 필사 과정에서 으레 발생하는 잘못 쓴 글자와 첨삭을 문제 삼고, 표현상 세계, 국가, 산업, 문화, 자유, 평등, 인류 같은 단어가 최 근세 용어라 지적한다. 과연 최근세 용어인가?

그러나 위서론자들이 최근세 용어라 지적하는 단어들(세계=능엄경, 국가=주역, 산업=한비자, 문화=주역, 자유=옥대신영, 평등=금강경, 인류=장자)은 실로 2천 년 전후부터 동방에서 지식인들이 사용한 문화 언어다.

위서론자들은 더 나아가서 환단고기가 천 년에 걸쳐서 쓰여진 책이 아니라, 1940년대 이후 이유립 한 사람이 지어낸 위서라 주장한다.

한마디로 환단고기를 읽어서는 안 될 이 시대의 금서禁書, 편협한 민족주의를 대변하는 조작된 최악의 위서僞書, 주류사학의 역사관을 뒤집는 이단서異端書라고 일관되게 매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환단고기 위서론 주장)은 부정을 위한 부정의 논리이며, 그야말로 지성의 가면을 쓴 억지가 아닐 수 없다.

건전한 양식을 가지고 사서의 내용과 가치를 밝혀야 할 학자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무조건 환단고기를 부정, 폄하하는 행태는 그들의 지성을 의심하게 하는 증표가 아닌가?

철저한 보정을 거쳐서 탄생한 동서양 고전!

동서양의 고전과 각 분야의 소중한 문화원전 가운데 순수하게 원본 그대로 전하는 것은 거의 없다.

동서고금의 지혜와 영성문화, 생활과 의술, 예술과 신앙 등 각 분야에서 시대를 넘어 이어온 숭고한 종교사상, 위대한 사상가의 가르침을 담은 원전原典은 후세에 뛰어난 인재들의 철저한 보정과정을 거쳤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동서양의 종교, 의학, 명상기도의 경전이나 불멸의 고전은 반드시 숱한 보정작업을 거쳐서 진정한 인류의 진리 양식으로 거듭난 것이다.

동서 인류의 문화원전의 본래 뜻을 좀 더 바르게 전하려는, 인류의 진정한 문화 창조의 지고한 노력이 바로 보정작업인 것이다.

이처럼 동서양의 모든 고전은 그 전승과정에서 적잖은 첨삭과 교정이 이루어져 거듭나지만 이 소중한 고전들을 그 누가 위서라 주장하겠는가?

우리가 잘 아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본래 이름은 태사공서太史公書였다. 여러 손을 거치면서 다른 사람의 글이 찬입竄入되고 몇몇 대목은 망실된 상태로, 수백 년이 지나 사기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물론 그 원본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판본의 연대조차 확실하지 않은 사본들이 전하지만 오늘날 사기를 조작된 위서라 매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한국의 삼국유사도 초간본은 없고 조선시대 판본만 전한다.

판본들 사이의 차이도 상당하다.

조선 중종(1512) 때 간행된 정덕본을 기준으로 하여 기존 판본들을 대조하면 연표인 왕력편에만 55백여 글자 가운데 30여 곳이 다르다.

삼국사기1981년에 발견된 고려 때 판본을 기존 판본과 비교한 결과, 오자誤字가 무려 3백여 개에 이른다.

이처럼 우리 고대사의 근간이 되는 두 사서도 판본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을뿐 아니라 오자誤字(틀린글자), 탈루脫漏(빠뜨림), 중복重複(거듭함), 전도顚倒(앞뒤가 바뀜), 혼효混淆(뒤섞임) 등 다양한 오류가 있다.

그러나 오늘의 학계에서는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는다.

동서양 깨달음의 결정체인 종교경전도 다르지 않다. 오늘의 모든 불교 경전을 석가모니가 직접 저술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경은 동서양의 많은 언어로 수없이 번역되었고, 여전히 그 자체로 부처의 진리 말씀으로 받아들여진다.

공자의 가르침이 잘 나타나 있는, 유가의 경전 논어는 어떠한가?

처음에 이 문헌은 그 이름이 없었고 누가 지었는지 확실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논어를 위서라 말하지 않는다.

도가 경전은 어떠한가? 노자는 원래 덕경德經도경道經의 앞에 있었으나 왕필이 도를 좋아하여 그 순서를 뒤집어서 도덕경道德經으로 재편집하였다.

장자33편은 장자 본인의 저작에다가, 장자 후학의 작품을 위서로 배제하지 않고 수용해서 내편외편으로 구성한 것이다.

그리고 열자는 그 저자가 실존인물인지 알 수 없을뿐더러, 후세 사람들이 열자의 이름을 빌어 새롭게 저술했을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이처럼 도가 원전에도 여러 가지 위서 논쟁거리가 있었으나, 지구촌의 그 누구도 그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

도가 경전은 여전히 감동과 끝없는 영감을 내려주는 동방 지혜의 으뜸가는 문화원전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신구약新舊約 성서는 어떠한가?

성서도 상당한 내용이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여러 저자들의 피나는 구도적 삶의 결실로서 설립되었고, 천 년의 유구한 세월에 걸쳐 전승되며 기록되었다. 그 과정에서 구약성서를 구성하는 책은 대부분 언제,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성서는 책 중의 책이라 불리며, 모든 크리스천의 삶의 지침서요, 생명의 양식이요, 서양문명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글을 써서 발표하면 두 번 다시 쳐다보지 않기로 유명한 영국의 화이트 헤드(A. N. Whitehead, 1861~1947, 20세기 대표 철학자, 수학자)는 현대 철학사의 걸작으로 꼽히는 Process and Reality 과정과 실재1929년에 간행했다. 당시 초판본은 젊은 철학자들이 혀를 찰 만큼 수백 곳에 오류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 50년 동안 전문학자들이 끊임없이 검토하고 최종적으로 셔어번(D.W. Sherburne. 1929~ )과 그리핀(D.R. Griffin. 1939~2017) 두 학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보정하여 반세기가 지난 1978년에 아름다운 명문장으로 새로이 출간되었다.

환단고기를 위서라 주장하는 식민사학자들의 관점으로 만일 동서양 경전과 각 분야의 고전을 재단한다면, 이 숭고한 인류문화 유산은 후손들에게 끝없는 의혹과 시비만 던질 뿐, 오늘의 현대인에게 깊은 감동과 영감을 주는 진정한 고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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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진서론 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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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는 신라에서 고려를 거쳐 조선까지, 무려 천 년 동안 당대 최고 지성인들이 쓴 역사서다.”

석가불에 못지않은 도통 경계에 이른 신라의 도승이요 선덕여왕의 왕실 고문이었던 안함로(579~640), 고려 말 여섯 임금을 섬긴 절세의 대학자로서 수문하시중(총리)을 지낸 이암(1297~1364), 고려 72현 중 한 사람으로 이암과 함께 소전거사에게 잃어버린 상고사의 문헌과 비장 서적을 전수받은 범장(복애거사 범세동, 1342~?), 불세출의 대학자 성군인 세종의 아버지 태종의 스승이었던 원동중(원천석, 1330~?), 조선 중중 때 왕의 역사 찬수관을 지낸 이암의 현손(5세손) 이맥(1455~1528)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이 저술한 사서史書를 모아 호남의 3대 명문장가로 꼽히는 해학 이기(1848~1909)가 교열하고 그의 애제자 계연수(1864~1920) 선생이 합본하여 1911년에 초간본 환단고기30권을 출간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동북아 한민족의 창세 역사, 문화정신의 원형이 복원되어 온 천하에 선언되었다.

환단고기원본을 품에 안고 남하한 한암당 이유립 선생, 50여 년에 걸쳐 삶의 최후의 순간까지 보정작업을 지속하여,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문화의 참모습을 담은 환단고기를 오늘날 우리들의 가슴에 안겨주었다.

이처럼 환단고기는 그 원전 저자들과 저작 연대는 물론이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수된 과정과 마지막 보정작업자의 구체적 생애와 업적이 매우 분명하다.

실제 지구촌 문화 역사 현장에 가보면, 동서의 역사 전문가들도 기존 역사관이나 문화의식으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인류 창세 원형문화를 자주 만난다. 그런데 이에 대한 역사 진실이 쉽게 해석되는 감동스런 순간을 마주한다. 왜냐하면 인류 창세 원형문화를 해독할 수 있는 대표적인 문화원전 환단고기가 있기 때문이다.

한일관계 전문가 인하대 남창희 교수는 와세다대, 규슈대, 고베대에서 교환교수로 체류하는 동안 현지답사를 통해 환단고기고유의 한일고대사 관련 기록이 실재 역사였음을 밝혀냈다.

스페인의 고고학 박사 마리아 크루즈 베로깔 박사도 환단고기삼성기라는 상고사에 대한 고유의 기록을 담은 책이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놀라운 사건이다. 그것은 진위논쟁을 넘어서 사료로서 검토할 가치가 충분하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판단이야말로 올바른 학자의 양식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인류 정신문화의 원형을 드러내거나 역사문화의 큰 메시지가 담긴 책이 있다면, 설사 그 책의 일부분이 후대로 오면서 첨삭되었다 하더라도 아무런 고증 없이 위서로 몰아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대표적인 사례가 신라문화의 실상을 전하는 김대문金大問화랑세기花郞世紀라는 책이다. 이 책이 처음 발견(1989년에 필사본, 1995년에 모본母本이 발견됨)되었을 때, 학계에서는 이것을 무조건 위서라 몰았다.

그러나 같은 강단사학계의 서강대 이종욱 교수는 결코 위서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번역본을 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라문화의 실상과 삼국통일의 배경을 전해주는 우리의 시원 신교문화의 상징코드가 그 속에 소중하게 담겨있었다. 그것은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이 칠성회七星會를 조직하여 칠성우七星友와 더불어 나라의 큰일을 논의한 것이다.

칠성은 삼국통일의 근간이 되는 화랑도, 첨성대의 비밀, 신라 불교사상 등 신라 문화·역사의 근본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칠성은 바로 한국과 인류의 원형문화 언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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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논쟁의 핵심과 그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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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계연수 선생이 출간한 환단고기원본과 1949년에 오형기가 정서한 원본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는다.

이런 첨삭과 원본에 대한 존재 여부가 위서논쟁을 초래한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면 환단고기위서 논쟁에서 가장 뜨거운 논란거리는 무엇인가?

논쟁1: 첫째로 오형기가 정서한 환단고기1979년에 광오이해사에서 출간했는데 그 책의 원래 이름은 환단고기가 아니라 환단휘기라는 것이다.

논쟁2: 둘째로 환단고기에 수록된 태백일사太白逸史는 그 이름이 처음에는 태백유사太白遺史라는 것이다.

논쟁3: 셋째로 계연수 선생이 천부경의 발견과정에 대해서 쓴 계연수기서桂延壽寄書라는 편지 내용에 진위에 대한 해석이다.

계연수 선생은 한암당 이유립 선생에게 환단고기를 다음 경신년(1980)에 세상에 내놓으라.’는 유지를 남겼다.

그래서 한암당은 환단고기를 널리 펴내는 대신에 먼저 환단시대의 상고 역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환단휘기桓檀彙記를 내기로 결심하고, 환단휘기1집 홍익사서弘益四書, 2집 고사집록古史輯錄, 3집 고사유고古事類考, 4집 징무록徵務錄을 기획하였다.

그리하여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 태백진훈, 네 가지를 해설한 환단휘기1집을 1971년에 출간하였다.

한암당이 이처럼 환단시대의 역사를 밝히는 환단휘기를 기획하고 그 첫째 권을 발간한 것은, 계연수 선생이 1911년에 간행한 환단고기초판본 없이 어찌 가능했겠는가?

한암당이 기고한 몇몇 글에 태백유사라 쓴 것은 조선 중종 때 이맥이 지은 태백일사와 같은 책이다. 태백일사태백유사라는 이름으로 바꾸어서 표현한 것이다. 구문론에서 볼 때, 유사遺史와 일사逸史는 의미가 같다.

한암당은 다음 경신년(1980)까지 기다렸다가 환단고기를 세상에 내놓으라.’고 한 스승 계연수의 간곡한 유지를 받들려 했다.

한암당이 가슴 속에 일제의 칼날에 사지가 잘려 압록강에 수장된 스승의 참혹한 그 죽음을 기억하며, 약속의 날까지 환단고기라는 책명과 환단고기에 포함된 일부 책의 정확한 이름을 의도적으로 감춘 것은 오히려 당연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대부분 천부경이 태백산(묘향산)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어 비로소 세상에 나온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운초 계연수 선생은 일찍이 1899년에 천부경요해天符經要解라는 책을 간행하고, 1911년에 이미 천부경 전문이 수록된 환단고기를 발간한 바 있다.

선생은 19171월에 단군교에 보낸 한문에 현토하여 쓴 서신, 이른바 계연수기서에서 고운 최치원 필적의 천부경석각石刻을 발견한 경위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계연수기서桂延壽寄書-계연수 선생 서신-

일찍이 나는 스승으로부터 천부경에 대해 들은 바 있다. 스승께서는 천부경이 지금도 남아서 전해지는 곳이 있고(尙今遺傳處), 천부경은 신비로운 영험이 있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銘在心中) 그곳을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하고, 십 년 정도 약초를 캐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중 1916년 가을, 약초 캐러 태백산(묘향산)에 들어갔다가 인적이 미치지 않은 골짜기의 석벽에 고각古刻이 있는 듯하여, 손으로 이끼를 벗겨내니 글자가 나타났다(字劃分明), 이에 이것이 천부신경天符神經이라고 단박에 알아차렸다. 두 눈이 번쩍 뜨여 절하고 꿇어앉아 공경히 읽어 내려갔다(拜跪敬讀). 내가 이토록 기뻤던 이유는, 보배로운 이 글이 천부경이었던 것이요, 고운 선생의 친필(孤雲先生之奇蹟)이었기 때문이다. 가슴은 충만해졌고, 비로소 스승이 헛되이 말씀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돌을 쌓아 그 자리를 표시한 다음 돌아갔다가 다시 입산하여 3일 만에 가까스로 그 자리를 되찾아 탁본하였다. 그런데 탁본한 글자가 너무 모호하여(字甚模糊) 다시 탁본하려 하다가, 홀연히 운무가 일어나는 바람에 그만 산사山寺로 돌아오고 말았다.

탁본한 것을 밤새도록 살펴보았으나, 글자가 분명하지 않아 판독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천부경고각을 발견한 사연을 쓴 편지를 탁본과 함께 단군교에 보내게 되었다.“

계연수 선생은 이 서신에서, 묘향산에서 천부경고각을 발견하기 전에 이미 스승에게서 천부경을 전해 듣고 원본 내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음을 분명히 하였다. 선생은, 위서론자들이 말하듯이 천부경을 묘향산에서 처음 발견한 내용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최고운의 친필로 새겨진 천부경고각의 발견 경위를 확신에 차서 서술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천부경을 평소에 늘 암송暗誦하던 계연수 선생!

만약 선생이 전부터 천부경을 전혀 몰랐다면 석벽에 새겨진 고각이 어찌 천부경임을 단박에 알고, 두 눈이 번쩍 떠져서 절하고 무릎 꿇고 공경히 읽었겠는가?

훗날 단군교 본부는 그 편지를 계연수기서라는 이름으로 소개하였다.

그런데 대다수의 천부경연구자들은 편지 내용을 정밀하게 제대로 보지 않아 원래 천부경을 전혀 알지 못하던 운초가 묘향산에서 고각을 처음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천부경을 알게 되었다.’고 오해한다.

특히 위서론자들은 이런 잘못된 해석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운초가 1899년에 천부경요해를 쓴 것도 거짓이고, 천부경이 들어있는 환단고기1911년에 편집, 간행한 사실도 전혀 없었다고 성급하게 단정한다.

환단고기를 한암당의 완전한 창작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연수 선생이 천부경고각을 발견한 경위를 왜곡하여 환단고기원본의 발간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이런 위서론이 어찌 정당하다 할 수 있겠는가?

사료와 정보가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던 지난 세기에 통일신라에서 조선 중기까지 천여 년에 걸쳐 여러 저자가 독자적으로 집필한 다섯 문헌을 한암당 한 개인이 100% 창작해 내는 일이 어찌 가능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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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의 진정한 가치를 밝히는 새로운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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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환단고기의 가치와 진실에 눈을 떠서 우리 사학계의 문화계에 많은 이들이 잃어버린 역사의 원류를 찾아가는 여정에 소리 없이 동참해 오고 있다. 오늘도 이 땅의 진실한 지성들이 한국과 인류의 시원역사, 원형문화의 참모습을 드러내려는 열정을 아끼지 않는다.

중국은 만리장성 밖에서 발견된 5500년 전의 홍산문화를 자국의 기존 모든 사서 기록으로는 해석할 수가 없어서 신비의 왕국이라 불렀다.

*5의 문명: 신비의 왕국 홍산문화(1.소하서 문화, 2.흥륭와 문화, 3.사해 문화, 4.부하 문화, 5.조보구 문화, 6.홍산 문화, 7.소하연 문화, 8.하가점 문화)

식민사관, 중화사관, 반도사관을 제대로 벗어나지 못한 한국 강단사학계는 이 문화가 우리 선조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무책임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고질적이고 반민족적인 침략주의와 대국주의 역사관으로 길들여진 잘못된 상고역사 인식이다.

최근들어 이런 잘못된 상고역사 인식에 대해 근본적으로 새롭게 문제를 제기하는 깨어난 전문가들이 나와 새로운 연구결과를 내놓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연구 동향은 외국의 유명 학자들의 업적에도 이미 나타나고 있다.

중국 출신 장광직(1931~2001) 교수는 예일대학에서 출간한 상나라 문명에 대한 저서(Shang civilization)에서 문명을 창조한 주인공은 동방족이다.”라고 했다. 중국의 저명한 학자들 중에도 중국은 동이문화다.”라고 양심 선언을 한 사람이 적지 않다. 예컨대 엄문명(북경대 교수, 1932~)약론 중국문명의 기원(略論中國文明的起源)등의 저서와 논문 등에서 지속적으로 중국은 동이 문화라고 밝혔고, 임혜상(중국 인류학자, 1901~1958)중국 민족사에서 은나라 사람동이東夷라 하였다.

중국은 동이문화다.”라고 하는 것은 중국문화를 창건한 주인공은 동이東夷, 즉 동방 대인이라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홍산문화에 관한 중국 학자들의 논문을 영어로 번역 출간한 미국 여성 고고학자 사라 넬슨(Sara Milledge Nelson, 1931~)은 그 책에서 홍산문화의 특징은 농업과 가축, 어업을 겸했는데, 이것은 당시 한반도의 삶과 동일하다. 동북지역의 고인돌은 한국과 완전히 같다.’라고 했다. 특히 일부 지역의 온돌문화는 전형적인 한국문화로 보인다.’고 했다.

광역 홍산문화에서는 7~8천 년 전의 돌로 쌓아 만든 용과 토기로 만든 봉황의 원형이 나왔는데, 이것은 중원에서 발견된 용문화보다 2~3천 년이나 앞서는 것이다. 이런 용봉문화를 포함하는 삼신 칠성문화는 동북아의 환국, 배달, 조선의 문화정신이요, 전형적인 신교문화의 표지유물이며, 황하문명의 모체가 된다.

고조선이란 책을 낸 러시아의 유엠 부틴(1931~2002) 박사는 고조선은 적어도 1천 년 동안 중국 지배를 받지 않고 독자적 문화를 발전시켰다. 동북아 고대사에서 단군조선을 제외하면 동북아 상고 역사를 이해할 수 없고, 유라시아 문명의 원형을 말할 수 없다.’라고 일찍이 말한 적이 있다.

실로 유라시아의 쟁쟁한 유목문화를 창조하여 세계사의 운명을 바꾼 흉노, 선비, 돌궐은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인류의 창세 원형문화, 즉 신교 삼신문화를 발전시켜 동서 지구문명에 널리 3수 문화를 생활화 시켰던 것이다. \

국내에서 상고 역사 연구에 힘을 쏟고 있는 윤내현 교수는 일찍이 환단고기는 서지학적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고조선 연구에서 단군조선은 바로 우리 민족사회와 문화 특성의 원형이라 하고, 한국 열국사 연구에서 백제는 중국 동부지역을 거의 복원하고, 그 최하단 남부지역 일부까지 한때 지배했다.”고 주장한다. 환단고기를 부정하는 한영우(사학자, 1938~ 다시 찾는 우리역사저자) 교수도 한국사의 베스트셀러가 된 다시 찾는 우리역사최신 전면 개정판에서 아사달족의 종교는 무교이고 신교神敎라고도 불렀다. 삼신三神은 일신一神인데 하늘··인간은 원방각圓方角으로 상징된다.’고 말한다. 우리 동이족은 아사달족이고 홍산 문화의 주인이라 하며 그 역사 강역을 산동성 아래 회수 유역까지로 본다.

이러한 최근 연구는 오늘의 한국인과 인류의 창세 원형문화의 삶의 참 모습을 보여준다.

이 문화권의 중심 주제는 바로 동방 신교 삼신문화의 원형으로 고스란히 드러나지 않는가?

환단고기야말로 한민족 역사서를 넘어 인류 창세역사와 동서 고대문명의 원형정신을 담은 세계유일의 원형문화 원전이요, 역사 대경전經典이다.

서지학적 측면에서 볼 때, 필사본 전수 과정에서 반드시 생겨나는 일부 오착과 가필이 설혹 환단고기에 적지 않게 있다 할지라도 태고시절 이래 인류가 창조해 온 역사와 동서문화의 원형정신을 담고 있는, 이 책의 신교 삼신문화 역사관과 우주광명사관, 불멸의 가치는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

환단고기를 역사가의 생명인 중도中道 정신의 안목으로 경건하게 읽는다면, 환단고기의 사서 가치와 역사의 진실을 크게 깨닫게 될 것이다.

이토록 소중한 환단고기를 우리 조상들이 1천 년에 걸쳐서 쓰고, 생사를 걸고 간행하고, 평생 보정작업을 해서 우리들 손에 건네주셨습니다.

우리는 진정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환단고기가 전하는 우리 한국인과 인류의 숭고한 태고역사의 진실을 되찾으려는 고귀한 여정에 우리 모두 손잡고 함께 참여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한국사와 인류창세사의 9천년사의 진면목을 애써 외면하려는, 저 위서론 논쟁의 핵심을 온전히 간파해야 한다.

인류는 본래 한 형제, 한 가족일진대.

진실한 마음으로 동행하는 자, 그 누구든 형제자매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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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소모적인 진위논쟁을 넘어 환단고기책 속에 담긴 진정한 역사 진실, 위대한 원형문화 정신과 가르침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한암당 이유립 선생의 환단고기교정 작업은 실제로 적지 않은 부분이 전문 편집자들이 대신 했어야 할 보정補正작업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환단고기보정작업은 계속 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환단고기 이야기 http://blog.naver.com/greatcorea10/221228529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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