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근의 분석] COVID-19의 진격, 현대문명 길을 잃다
송호근 포스텍 석좌교수 입력 2020.04.09. 21:32 수정 2020.04.09. 23:42
[현대문명과 코로나]
외적인 풍요로 질주한 현대 문명, 통신과 물류만 남긴채 통째 중단.. 250년간 쌓은 탑 허약성 드러나
코로나 아직 1파도 안 끝나.. 2파와 3파에 대비해야 할 때
지금의 경제정책 전면 폐기하고 완전한 새판 짤 준비 서둘러라
현대 문명은 약골이었다
팬데믹 공포, 인류가 겪었던 대재앙을 알긴 했지만 생애 처음 당한 바이러스의 진격에 당혹스럽다. 공상소설(SF)에서 뛰쳐나온 공포! COVID-19는 지구촌에서 가장 발달한 문명 지역을 먼저 강타했고, 점차 후진 지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 기묘한 위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1차 팬데믹에 녹초가 된 선진국들이 잠시 휴전에 들어갈 즈음, 2차 팬데믹이 후진 지역에 몰아칠 것이다.
모든 국가가 국경을 봉쇄했다.
통신과 물류만 남긴 채 세계화 네트워크는 통째로 중단됐다. 21세기 인간의 조건과 삶의 환경이 일시에 마비된 것이다. 가까운 시일에 복원 절차를 밟더라도 쓰나미에 폐허가 된 마을을 보는 듯한 허망한 심정을 지울 수 없다.
산업혁명 이후 250년 쌓아올린 문명의 체질이 이토록 허약했다니. 위풍당당했던 현대 문명의 행진이 초라한 몰골을 드러낸 것이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가시적인 것의 극대화, 보이는 것에만 집중했던 인류의 이기적 욕망 탓이었을까?
문명의 밝은 쪽만 바라봤을 뿐 '문명의 이면' '문명의 그늘'을 도외시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는 중이다.
문명의 그늘
'문명'은 그리스어 'civilitas'의 변용이다. 시민적인 것, 세련된 것, 예절을 뜻한 이 말이 역사적 과정을 거쳐 '문명'(civilization)으로 변화했다. 예절 바름(civil) 개념이 우아, 세련, 풍족, 안락 관념을 흡수하면서 현대 물질문명의 본질로 정착한 것이다.
결국 현대 문명은 개척과 발명, 성장과 발전, 생산성과 효율성 등 자연의 인위적 변용과 이기(利器)의 활용을 포괄하는 개념이 됐다.
생태계의 혼란과 자연의 반격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조심스럽게 제기되었지만 외적 풍요, 가시적 성취를 향한 현대 문명의 질주를 막지 못했다.
의과학자, 물리학자, 생물학자들이 가시적 세계의 안쪽을 본격적으로 탐험한 것은 불과 한 세기 정도다. 문명의 내부에서 번식하는 미립자의 세계는 여전히 미궁이다.
빌딩이 올라가고 도시가 팽창할수록 '문명의 그늘'은 더욱 짙어졌고, 교역, 인구 밀집, 인구 이동의 역학과 동선을 따라 미립자의 세계는 독자적인 제국을 형성했을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그 제국의 영토에서 '비가시적인 것'들이 활기차게 번식해 왔음을 COVID-19는 가장 과격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일깨웠다.
하버드 의대 학장의 축사
'하버드 의대'라는 책에서 읽은 한 구절이다. 학장이 입학식 축사를 했다.
"인류는 겨우 40여 가지 질병만을 정복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아직 감기도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1960년대였기에 지금은 정복한 질병 리스트가 조금 길어졌을지 모른다. 알렉산더 플레밍이 항생제를 발견한 것이 고작 1928년, 치료에 사용한 때는 1940년대였다. 천연두의 종식은 1977년, 결핵·콜레라·장티푸스를 이제 겨우 통제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홍윤철, '팬데믹'). 사스(SARS)와 메르스(MERS)도 다시 강력한 변종이 출현해 인류의 미래를 사정없이 흔들어댈 것이다. 진화는 변이(變異)이고, 변이는 균형을 깨는 과정이다. 문명이 호모사피엔스의 번성을 위해 자연과의 '위태로운 균형'을 깨면 깰수록 비가시적인 것들은 더욱 두려운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COVID-19는 하나의 경고일 뿐이다. 그 하찮은 미립자는 현대의 안락이 무엇을 희생했는지를 일깨웠다. 우리가 추구한 문명적 가치가 과연 정상적인 것인지를 물었다. 불과 두어 달, COVID-19의 성취는 경이롭고 두렵다.
보이지 않는 적
문명은 '보이는 적'과의 전쟁에서 취득한 전리품이다. 무적함대의 상징인 루스벨트함이 무기력하게 운항을 중단했다. 한 발의 미사일 위협도 없었다. '보이지 않는 적'에게 당한 무장해제, 이제 세계는 비가시적 적과의 전쟁에 돌입하는 현실과 맞닥뜨렸다.
그 전쟁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100년 전 스페인 독감으로 5억명 감염에 5000만명이 죽었다. 노동력 감소로 식량난이 발생했고 산업이 주저앉았지만 국민국가의 역량 내에서 힘겹게 수습해 냈다.
그런데 지금의 팬데믹 충격은 국력 문제가 아니다. 생산과 소비의 세계적 분업 네트워크를 여지없이 망가뜨렸기에 강대국조차 감당하기가 어렵다.
세계 최고 자동차 기업이 산소호흡기를 못 만들고, 최고의 패션 업체가 마스크 제조에 쩔쩔맨다. 부품·식량·자원을 조달하지 못하는 부자 국가가 속출한다.
생산의 연쇄 고리가 끊기면 부국이든 빈국이든 기업 파산과 실업자 양산을 피할 수 없다. 불과 한 달간 미국에서 실업자가 1000만명 발생했고 중국에서는 2억명이 직장을 잃었다. 부품과 자원을 세계에 의존하는 한국은 초비상이다. 아마 여름쯤이면 공포의 한계선인 실업자 100만을 돌파할지 모른다.
키신저가 지적했듯 글로벌 공급망의 본국 회귀와 성곽도시(walled city)로의 전환 위협에 모든 국가가 대비책을 세워야 할 상황에 직면했다.
현대 문명이 오만하게 올라앉았던 '위태로운 균형'은 깨졌다. '국제 공조'의 소중함을 알지만 일단 한번 깨진 균형을 원상 복구하기란 쉽지 않다.
한국형 방역(防疫) 모델
한국형 방역 모델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이 퍼지고 있다.
촘촘한 정보망, 택배 시스템, 편의점, 선진적 건강보험과 양질의 서비스, 광범위한 검역과 신속한 대응 조치 등. 무엇보다 사회적 방역과 생활 방역에 솔선수범하는 시민 의식이 돋보였다. 외국의 부러움을 살 만한 우리의 자산임은 분명하다.
COVID-19가 번성할 환경, 고(高)인구밀도, 고(高)접촉 문화, 고(高)도시 집중도의 삼중 위험을 적시의 정부 개입과 의료 인력·자원의 자발적 동원력이 막아냈다.
그러나 느슨해질 때가 아니다. 두 달간 분투로 의료진은 지쳤다.
그런데 정부는 공(功)을 독점하려 하고, 정권은 총선 승리에 정신을 파는 사이 의료 체계 점검과 대체 인력 투입을 고민하는 주체는 묘연하다.
'만주감모(感冒)'로 불린 스페인 독감은 3파였다.
한국에서만 750만명이 감염됐고, 14만명이 죽었다. 2파가 훨씬 강력했다.
COVID-19 사태는 아직 1파도 끝난 상태가 아니다. 초여름에 1파가 끝나고, 언제 2파, 3파가 밀어닥칠지 모른다. 만약 확진자가 2만명에 달했다면 한국의 의료 체계는 붕괴했을 것이다. 의료진의 탈진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형 방역 모델'은 모범이 아니라 반면교사로 운위됐을 것이다. 민간 부문의 신속한 대응력과 헌신이 1파를 통제한 일등 공신이다. 가구당 재난 수당 100만원, 의료진에게는 재난 극복 특별 수당을 지급해야 마땅하다. 발 벗고 나섰던 대구 동산병원은 심각한 재정 적자에 직면했다.
앞에서 '적시의 정부 개입'이라 했지만, 갈팡질팡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물리적 거리 두기'도 지역 감염 후에야 선언했고, 마스크 분배 정책은 낙제점이었다. 2파에 대비하고 있는가? 의료진과 의료 기구, 병실과 의약품을 제때에 조달할 수 있는가? 낙관할 때가 아니다. 이번 사태에서 지자체의 역할은 돋보였다.
질본과 방역대책본부는 박수를 받을 만하다. 그런데 누가 이들의 진단과 제언을 실행에 옮기는가? 2파와 3파에 대비한 방역 거버넌스는 견고한가? 대통령 주치의는 있어도 국민 주치의가 없는 나라가 한국이다. 차제에 국립 감염 전문 병원을 만들고 국가보건실(NHC·National Health Council)을 신설해야 한다.
메가톤급 대변동
COVID-19가 문명의 근본을 질문했듯이, 현(現) 경제정책의 '전면 폐기'와 '본격적 새판 짜기'가 아니고선 경제 쓰나미를 극복하기 어렵다. COVID-19는 소득 주도 성장같이 이념으로 치장한 시장에서 더욱 기승을 부린다. 시장 기능이 복원되지 않는다.
자영업과 소상공인의 절반 이상이 거리에 나앉는 상황, 대기업이 파산 직전에 몰리거나 중요 자산을 매도할 시기가 곧 닥쳐올 것이다. 파산 도미노는 항공·자동차·철강·석유화학 등 한국 경제의 주력부대를 훼손하고, 월급 생활자를 덮칠 예정이다.
비정규직과 일용 노동자는 이미 타격을 받아 절망적이다.
외국 거래 기업, 생산과 소비 시장, 금융이 비상 상태로 돌입한 지금 시장력을 훼손하는 것은 다 폐기 처분해야 한다.
임직원이 몇 달치 월급을 반납해도 항공기가 다시 뜰지는 미지수다.
돈을 살포해도 공장이 다시 돌지도 의문이다.
금융·증권사의 현금 보유액도 파산 기업과 더불어 급격히 증발할 것이다.
생산과 소비의 세계적 위축은 내년에 더욱 치명적이다.
분업망이 크고 넓은 재벌 기업일수록 악재가 크다. 예컨대, 20만 협력업체를 거느린 자동차 산업이 붕괴하면 한국은 지옥이다. 해외 공장은 이미 멈췄다.
오로지 경제 회생!
재벌 대기업은 대규모 구조 조정이 불가피하다.
고용 구조와 근무 형태가 당장 달라진다.
파산에 몰린 소상공인들은 회생 가능할까?
월급 생활자들은 가계 부채와 세금을 감당할 수 있을까?
망가진 산업은 일어날까?
한국은 세계 분업의 최혜국이다.
분업 와해의 소용돌이에 익사하는 한국 경제를 현 정권은 회생시킬 실력이 있는가? 청와대의 비상 경제팀 결성을 시급히 제안한다.
100조원 규모 경기 부양책은 응급조치용이고, 세계적 분업 구조에서 한국의 위치 재선정에 관한 중장기 전략이 필요하다.
미시 조정과 이념 성향이 강한 사람은 제발 멀리하고, 중립적 성향의 최고 거시 전문가들이 모여야 한다. 경제 회생에 생사가 달린 만큼 우선 소득 주도 성장, 최저임금제, 주 52시간제도 폐기할 각오를 해야 한다.
파산의 무덤에 돈을 뿌려봐야 싹은 돋지 않는다. 누가 어떻게 새판을 짤까?
바이러스 위협에도 선거에 나서는 한국을 COVID-19가 지긋이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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