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교36 보천교에서 5만원 지원 받은 김좌진 장군 보천교에서 5만원 지원 받은 김좌진 장군 김좌진 장군, 보천교에 5만원 지원 받아 북로군정서 김좌진 총사령관은 홍범도 이범석 장군과 함께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간 청산리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군이 패전 후 군대를 증파하여 죄 없는 민간인들을 죽이고 한인부락을 초토화시키는 등 만행을 일으키자 김좌진 장군은 부대를 전략상 소련과 만주 국경지대인 밀산-수분하와 북만주-동녕현으로 이동하였다. 독립군도 무기와 식량보급 등의 문제로 차츰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김좌진 장군은 1923년 초에 최측근 유정근을 밀사로 파견하여 보천교의 차월곡 교주에게 군자금 지원을 요청하면서 '만주로 들어와 독립운동을 함께 하자'는 서한을 보냈었죠. 이때 유정근은 일제에 붙잡.. 2017. 11. 20. 보천교에 "빚을 많이 졌다"고 발언한 백범 김구 선생 보천교에 "빚을 많이 졌다"고 발언한 백범 김구 선생 백범 김구 "상해임정은 보천교에 빚을 많이 졌다" 보천교의 재정간부 김홍규는 불교계의 거목 탄허스님의 선친인데,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거금 10여 만원을 숨기고 있다가 일경에게 발각되어 고문을 당했고, 상해임시정부 간부 라용균 제헌의원은 보천교 간부 임규로부터 5만원의 자금을 건네받아 상해 임정에 전달하였다고 증언했다. "비밀리에 전달되는 독립자금의 특성상 보천교가 실제 얼마만큼의 재정지원을 임정에 했는가는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일본 검경 문서나 재판기록에 만주 독립군 요원이 국내에 침투하여 보천교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으려다 체포된 사례를 보면 보천교가 해외독립운동에 재정후원을 한 정황은 많습니다.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 독립운동 관련 판.. 2017. 11. 20. [보천교] 차경석과 부친 차치구, 전봉준 장군과 마지막까지 생사를 같이하다 [보천교] 차경석과 부친 차치구, 전봉준 장군과 마지막까지 생사를 같이하다 차경석과 부친 차치구, 전봉준 장군과 마지막까지 생사를 함께 해 보천교 교주 월곡 차경석(1880~1936)이 항일투쟁과 민족독립에 적극적인 것에는 그의 아버지인 차치구의 죽음이 큰 영향을 미쳤다. "월곡 차경석의 부친 차치구는 전봉준 장군과 아주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차치구는 동학접주로 정읍에서 기두하여 혁명에 가담했는데, 동학군이 일군에게 공주전투와 우금치에서 전멸당하고 전봉준 장군이 피노리에 숨었을 때 같이 동행을 했습니다. 차경석의 아버지가 밀고를 당해서 참혹하게 분살형을 당했는데, 차경석의 장녀 차봉수씨의 증언에 의하면 차치구의 몸이 다 타버려서 차경석이 몰래 아버지의 두상만 가지고 나왔다고 합니다. 존경하던 아버지를.. 2017. 11. 20. 보천교 교주 차경석, 제주도에서 가장 큰 규모 항일운동 지원 보천교 교주 차경석, 제주도에서 가장 큰 규모 항일운동 지원 차경석, 제주도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항일운동 지원 일제는 1917년 4월 24일 차경석을 국권회복을 추구하고 배일사상을 가진 위험한 인물로 생각하여 '갑종 요시찰인물'로 분류하였다.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전국을 돌다 경상북도 영일군 출신의 김연일 등과 상의하여 1918년 9월 19일 제주도 법정사(法井寺)에 교도 약 30명을 소집하여 "왜놈은 우리 조선을 병합하고 우리 동포를 학대하고 가혹하게 다루니 실로 왜놈은 우리 조선민족의 원수다. 이제 국권을 회복함으로써 교도는 우선 도내 거주의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일본인 상민들을 쫓아내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1918년 10월 6일 밤 김연일은 신도 33명을 소집하여 인근 각 면.이장들에.. 2017. 11. 20. 이전 1 ··· 3 4 5 6 7 8 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