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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코드/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황극경세서 관물내편 6

by 태을핵랑 2017. 12. 17.

황극경세서 관물내편 6

 

觀物內篇 六

 

 

공자孔子역경易經을 기리며 말하기를 복희伏羲와 헌원軒轅으로부터 내려왔고 상서尙書의 시작은 요임금과 순임금에서부터 내려왔으며, 시경詩經을 정리함에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으로부터 내려왔고 춘추春秋를 정리함에 환공桓公과 문공文公으로부터 내려왔다. 복희 · 헌원으로부터 그 아래는 조로서 삼황三皇이고 요임금과 순임금으로부터 그 아래는 종으로서 오제五帝이며,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으로부터 그 아래는 자로서 삼왕三王이고 환공桓公과 문공文公으로부터 그 아래는 손으로서 오패五覇이다.

 

■ 조祖의 삼황三皇은 현賢을 숭상하였고 종宗의 오제五帝도 또한 현賢을 숭상하였다. 삼황三皇은 도道로 현賢을 숭상하였고 오제五帝는 덕德으로 현賢을 숭상하였다. 자子의 삼왕三王은 친親을 숭상하였고 손孫의 오패五覇도 또한 친親을 숭상하였다. 삼왕三王은 공功으로 친親을 숭상하였고 오패五覇는 힘[力]으로 친親을 숭상하였다.

 

■ 아아! 이미 지나간 시간이 억천만년億千萬年이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 또한 억천만 년이다. 공자孔子는 그 중간에서 태어나 사람이 되었다. 어찌 조종祖宗은 적고 자손子孫은 많다고 하리요. 까닭에 요임금과 순임금을 거듭하여 칭찬하고 우왕禹王에 이르러 가로되 우왕은 내가 결점을 지적하여 비난할 수 없다고 하였다.

 

■ 공자孔子는 우왕禹王보다 1,500 년 뒤이고 지금은 공자보다 1,500 년 뒤이다. 비록 감히 공자孔子가 요임금 · 순임금 · 우왕을 칭찬한 것에 비교하지 못하나 어찌 감히 맹자孟子가 공자孔子를 칭찬함에 비교하지 못하리요.

 

■ 사람들은 공자孔子가 땅이 없음을 슬프고 아깝게 여기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 한 성인 남자는 100 묘의 땅을 가지고 대부大夫는 100 리里의 땅을 가지며, 제후諸侯는 사경四境을 영토로 삼고 천자天子는 구주九州를 영토로 삼는다. 그러나 공자는 만세萬世를 영토로 삼았다. 그런즉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백성이 생겨난 이래 공자孔子 같은 분이 있지 않다고 한 것은 지나치지 아니하다.

 

 

무릇 사람은 스스로 부자가 되지 못한다. 반드시 하늘이 재물을 내려 주는 것을 기다린 뒤에야 부자가 될 수 잇다. 사람은 스스로 귀하게 되지 못한다. 반드시 하늘이 그 귀함을 내려 주는 것을 기다린 뒤에야 귀하게 될 수 있다. 이러한즉 부귀富貴는 하늘에 달려있지 사람에게 있지 않다. 구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있고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이 있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 매인 것이다. 공덕功德은 사람에게 있지 하늘에 있지 않은 바 닦으면 얻을 수 있고 닦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도道에 매인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매인 것이다. 무릇 사람이 구하여서 부귀를 얻는 것은 얻을 수 있는 것을 구하고 얻을 수 없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알지 못한다. 구하여 얻으면 자기가 얻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긍심이 생긴다. 구하여 얻지 못하면 남이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원망이 생긴다. 만일 자기가 얻을 수 있음과 남이 줄 수 있음을 안다면 천하에 어찌 남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 천하는 더할 나위 없이 부유하고 천자天子는 더없이 귀하다. 어찌 망령된 뜻으로 구하여 얻을 것인가! 비록 천명天命이라고 하나 이 또한 맨 처음에 공적을 쌓고 음덕陰德을 베풀지 않으면 안 된다. 어진 임금은 어렵게 고생하여 이룩하고 어리석은 임금은 포악하여 멸망한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고 사람의 뜻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지은 허물은 참으로 벗어나기 어렵다. 하늘이 내리는 재앙을 물리치려면 더하게 되는바 공적을 쌓기를 거듭하는 것이 군자君子의 정해진 분수이다. 구하여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구하여 그렇게 되는 것은 인仁에 이롭다. 군자君子가 어찌 그 사이에 그다지 요긴하지 않은 일을 하겠는가! 그러나 행幸과 불행不幸이 있음은 비로소 명命이라고 말할 수 있다.

 

■ 하夏나라 우왕禹王은 천하에 공功이 있었으나 하夏나라 걸왕桀王은 포악하여 천하를 잃었다. 은殷나라 탕왕湯王은 천하에 공功이 있었으나 은殷나라 주왕紂王은 포악하여 천하를 잃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천하에 공功이 있었으나 주周나라 유왕幽王은 포악하여 천하를 잃었다. 이 셋은 시대는 같지 않으나 그 패망하게 된 형태는 똑같다.

 

■ 주周나라 평왕平王이 동쪽으로 도읍을 옮겼으나 공功이 없어 왕업王業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주周나라 난왕?王은 서쪽으로 달아나 포악하지는 않지만 왕실의 체통을 손상시켜 위엄과 명령이 하나의 작은 제후국諸侯國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오패五覇가 형식적으로 우러러 받들었을 뿐이지만 이것에 만족하였다.

 

 

■ 그러나 이 때에 참다운 임금이 나타나지 않았다. 비록 헛된 이름이 있었으나 기杞나라 · 송宋나라와 그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때에 『춘추春秋』를 지었으니 옳지 않은가!

 

■ 공자孔子가 주周나라 평왕平王 때부터 임금의 자취가 사라졌음을 깨닫고 경서經書를 편찬하였는데 『상서尙書』는 진晉나라 문후文侯에서 끝맺음하고, 『시경詩經』은 국풍國風을 첫머리로 하여 배열하였으며, 『춘추春秋』는 노魯나라 은공隱公에서 시작하고, 『주역周易』은 미제괘未濟卦에서 끝맺음하였다.

 

■ 나는 공자孔子를 알지 못하나 공자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다. 예악禮樂과 정벌征伐은 천자天子에게서 나와야 한다. 그러나 제후諸侯로부터 나오면 천자天子의 위엄은 없어지게 된다. 종주국인 주周나라의 공덕功德은 문왕文王 · 무왕武王으로부터 나왔고 여왕?王 · 유왕幽王으로부터 문왕文王 · 무왕武王의 기업基業이 쇠퇴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서융西戎이 중국을 업신여기게 되었다. 주周나라의 제후가 하나가 아니나 유독 진晉나라 문후文侯만이 서융과 북적北狄을 물리치고 임금을 동쪽인 낙읍洛邑으로 옮겨 왕실을 보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천하 사람이 패자覇者라고 불렀으며, 천자天子께서 거창과 규찬圭瓚[좋은 술과 옥같은 찬]의 예물을 내려 주시는 것을 면하리요!

 

■ 전傳에 이르길 자공子貢이 초하루마다 조상에게 제사 드릴 때 쓰는 양으로 인해 노나라를 떠나고자 함에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자공아, 너는 그 양을 아끼지만 나는 예禮를 사랑한다. 이름만 있고 내용이 없는 것은 이름과 내용이 함께 없는 것보다 오히려 나음을 알 수 있다. 예禮는 비록 없앴으나 양이 남아 있으니 뒷세상에 예禮가 다시 행하여지지 못할 것을 어찌 알겠는가! 진晉나라 문공文公이 임금을 떠받들어 비록 헛된 이름을 사용하여 오히려 힘으로 천하의 제후들로 하여금 주周나라 천자天子가 있음을 알게 하였고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게 하였다. 진晉나라가 쇠퇴하게 되자 진秦나라가 이로 말미암아 주周나라를 멸망시켰다. 이 예禮를 사랑한다는 말에 참으로 거짓이 없음이로다.

 

■ 제齊나라 경공景公이 일찍이 어느 날 공자孔子에게 정치를 물었다. 공자孔子가 가로되 임금은 임금의 도리를 다하고 신하는 신하의 구실을 다하며, 아버지는 아버지의 도리를 다하고 자식은 자식된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경공景公이 가로되 좋은 말씀입니다. 만일 임금이 임금의 도리를 다하지 않고 자식이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않는다면 비록 음식이 있을지라도 저는 얻어서 먹을 것입니다. 이때 제후가 천자天子를 참칭僭稱하고 배신陪臣이 나라의 명령을 집해하였으며, 녹祿이 공실公室에서 떠나고 정치적 명령이 사문私門에서 나왔다. 경공景公은 자신이 주周나라 천자天子를 받들지는 않고 그의 신하들이 자기만을 받들어 주기를 바랬는데 이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그 후 제나라 임금이 죽자 나라가 전田씨에게로 옮겨갔다. 무릇 제나라에 있어 전田씨는 진晉나라에 삼가三家가 있는 것과 같고 주周나라에 오패五覇가 있는 것과 같다. 한韓 · 조趙 · 위魏는 진晉나라에 공적을 세워 땅을 나누어 받았는데 그 임금을 업신여기고 또 나라를 마음대로 하였다. 전田씨는 제齊나라에서 녹祿을 먹고 또 정치를 전횡하였는데 그 임금을 죽이고 사직을 빼앗았다. 그와 같은 천하의 사건이 어찌 점차로 된 것이 아니겠는가! 서리를 밟듯이 경계하고 어찌 근심하지 않으리오.

 

 

■ 전傳에 이르기를 왕王이란 보내는 것이다. 천하를 보내는 것이야말로 왕王이라 할 수 있다. 주周나라가 쇠하자 제후들이 천자天子를 배알하지 않음이 오래되었다. 급기야 초楚나라도 중국의 회맹會盟에 참여하게 되었고 공자孔子도 자작子爵의 작위爵位에 오르게 되었다. 초楚나라가 왕王을 참칭함이 비루하지 않은가.

 

■ 무릇 힘으로 사람을 이기려고 하면 그 사람 역시 힘으로 이기고자 한다. 오吳나라가 일찍이 월越나라를 쳐부수고 초楚나라의 뜻을 깔보았다. 탐욕으로 공功을 취함에 도덕道德과 의리[義]를 돌아보지 않고 제濟나라와 진晉나라를 침략하고 능멸하였다. 이것은 오로지 오랑캐의 일이다. 마침내 월越나라가 다시 일어나서 오吳나라를 멸망시켰으나 월越나라가 또 거울로 삼지 않았다. 그 뒤에 초楚나라가 다시 일어나서 월越나라를 멸망시켰으나 또 거울로 삼지 않았다. 그 뒤에 진秦나라가 크게 일어나서 주周나라를 멸망시켰으나 또 거울로 삼지 않았다. 그 뒤에 한漢나라가 일어나서 되는데 강함을 믿고 약함을 능멸하니 범이나 표범과 무엇이 다르리오. 이것은 중국 의리義理의 본보기가 아니다.

 

■ 송宋나라는 제후국으로 작위爵位가 높았으나 힘이 약했다. 회맹會盟에 참여하는 데 있어서 덕德도 부족하고 힘도 모자랐다. 보잘것없이 약한 제후국과 함께 중원으로 내몰려 구차하게 자리잡고 있다가 나중에 패자覇者가 되었으니 어찌 어렵지 않으리오.

 

■ 주周나라와 같은 성씨의 제후이면서 끝까지 남은 나라는 오직 연燕나라뿐이다. 연燕나라는 북쪽에 있어 중원中原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구차하게 한韓 · 조趙 · 위魏 · 제齊 · 초楚나라와 더불어 헛된 이름을 좇아 군사를 일으켜 다투지 않고 덕德을 기르고 때를 기다렸다. 제후의 변화를 살피니 진秦나라가 비록 범과 이리와 같이 사나우나 쉽게 쳐들어가지 못했으나 15~16 년 뒤의 천하의 일을 알지 못하였다.

 

■ 중원中原의 당은 사방 9,000 리里로 옛날에도 늘지 않았고 지금도 줄지 않았다. 그러나 제위帝位에 기록 짧음이 있고 땅에 크고 작음이 있는 것은 공격과 수비가 달랐기 때문이다. 하夏 · 은殷 · 주周 3 대代로부터 내려와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때에 가장 왕성하였으며, 진秦나라의 경계는 주周나라와 한漢나라의 사이이다. 진秦나라는 목공穆公에서부터 왕성하기 시작하여 효공孝公때에 중흥하였고 시황제始皇帝 때에 멸망하였다. 서쪽 오랑캐에서 일어나 기산岐山으로 옮겼다가 함양咸陽으로 서울을 옮겼다. 천지에 군사가 가득하고 온 세상이 피로 물들었으며, 사해四海를 집어삼키고 옛적과 지금의 것을 죄다 바꾸었다. 비록 3 대代의 덕치德治와 비교할 수 없지만 진晉나라 · 수隋나라와 같은 연배에 놓고 말하지 않는다. 그 제위帝位를 영구히 보전하지 못한 것은 법을 사용함에 지나치게 잔혹하고 사람을 많이 죽인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공자가 상서尙書의 배열순서로 『진서秦誓』[진목공이 개과천선하여 스스로 맹새하고 오패의 우두머리가 된 일] 를 맨 끝에 두었는데 한 사건에 대한 그 말씀이 어찌 멀지 않겠는가!

 

■ 무릇 살리는 일을 좋아하면 삶의 무리이고 죽이는 일을 좋아하면 죽음의 무리이다. 주周나라는 살리는 일을 좋아하였는데 의義로써 하였다. 한漢나라도 살리는 일을 좋아하였는데 마찬가지로 의義로서 하였다. 진秦나라는 죽이는 일을 좋아하였는데 이익을 위해 하였다. 초楚나라도 죽이는 일을 좋아하였는데 마찬가지로 이익을 위해 하였다. 주周나라가 의義를 위해 살리는 일을 좋아한 것은 한漢나라에 미치지 못하고, 진秦나라가 이익을 위해 죽이는 일을 좋아한 것은 초나라보다 지나쳤다. 하늘의 도道와 사람의 정情이 어찌 주周나라 · 진秦나라 · 한漢나라 · 초楚나라를 선택하겠는가? 선악善惡을 선택할 뿐이다. 선善이 천하에 적수가 없으면 천하가 모두 선하게 되고 악惡이 천하에 적수가 없으면 천하가 모두 악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하늘의 도道와 사람의 정情이 또 어찌 주周나라 · 진秦나라 · 한漢나라 · 초楚나라를 가리겠는가. 선악을 선택할 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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