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DNA를 찾아서(l회) <유라시아 대초원에 등장한 기마군단>
김석동 ㅣ 기사입력 2020/01/06 [09:45]
대한민국은 현재 세계에서 경제 규모가 11번째에 달하는 국가로 세계사의 중심에 서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IT 강국, 한류의 나라로 탈바꿈한 대한민국의 기적의 원천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두드러진 것은 한민족의 DNA라고 할 수 있다. 한민족 DNA는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된다. 끈질긴 생존 본능, 경쟁을 두려워하지않는 승부사 기질, 강한 집단의지, 그리고 세계를 무대로 ‘나가서 승부하는’ 개척자 근성이다. 이런 한민족 DNA는 지난 2500년간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하면서 세계사를 써왔던 기마민족, 초원 제국의 전사들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광활한 유라시아 스텝 지역에서 오랜 기간 삶을 영위했던 기마유목민의 면면한 DNA가 오늘날 한국인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필요도, 부정할 수도 없는 사실이다. 한민족은 현대사에서 기적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성공 히스토리가 미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하고 시대의 흐름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지속가능한 성장은 물론, 현재의 위치마저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한국NGO신문은 김석동 전 금융위원회 위원장의 혜안이 투영된 <한민족 DNA를 찾아서>를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2020년 1월 6일 새해 첫 주부터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1. 유라시아 대초원과 그 주인공 기마민족
유라시아 대초원은 어떤 곳인가
유라시아 대륙은 크게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북극해를 면한 가장 북쪽에는 동토인 ‘툰드라(tundra)’가 있고, 그 아래에는 침엽수림 지대인 ‘타이가(taiga)’가, 다시 그 아래에는 북위 40~50도 지역에 남북으로도 폭이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넓은 띠 형태의 대초원이 있고, 그 아래에는 사막 지대가 있다. 침엽수림 지대와 사막 지대 사이에는 아시아동부에서 유럽동부 지역까지 동서로 장장 8,000km에 걸쳐 광활한 초원 지대가 펼쳐져 있다. 만주-몽골 고원-카자흐 초원-러시아 초원-우크라이나-헝가리 평원에 이르는 이 지역을 ‘유라시아 대초원(Eurasian Steppe)’이라 하며, 알타이 산맥을 기점으로 동부와 서부 초원 지대로 나뉜다.
유라시아 대초원 지역
유라시아 대초원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첫째, 이곳은 지구상에서 가장 광활하고 평탄하다. 아시아 고원 지대 일부를 이루는 알타이 산맥과 톈산天山(천산) 산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지형이 초원이나 완만한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해주에서 만주 일대, 몽골, 내몽골 등 중국북부와 중앙아시아, 남부러시아, 우크라이나, 헝가리 평원 등 동부유럽 등지를 여행해보면 그야말로 끝없이 광활하고 평탄한 지형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 때문에 유라시아 대초원은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대단히 용이해, 고대로부터 이곳을 가로지르는 ‘초원로(초원길)’라는 기마유목민 전용 이동로가 있었다. 초원로는 잘 알려진대로 오아시스로(오아시스길)와 해로(바닷길)와 더불어 동서 문명 교류의 통로 역할을 해온 실크로드 3대 간선을 구성한다. 이중 초원로는 세 길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존재했던 동서 이동로로서, 기마유목민이 활동했던 중심 무대이자 동서간 문명 교류의 핵심 통로 역할을 담당해왔다.
둘째, 유라시아 대초원은 전반적으로 비가 적고 건조하다. 연 강수량은 250~500mm 내외에 지나지 않는다. 통상 연 강수량 250mm 이하를 사막이라고 하니 이 지역의 강수 사정을 가늠해볼 수 있다. 대초원 남쪽의 몽골 고원 남부와 투르키스탄 지역, 그리고 중앙아시아는 강수량이 극히 적어 고비 사막, 타클라마칸 사막, 키질쿰 사막, 카라쿰 사막 등 사막화된 지역이 많다. 중국 신장 웨이우얼 지역의 투르판은 연 강수량이 50mm대에 불과한 해도 있었다. 연평균 1,250mm의 비가 오는데도 물부족 국가라고 하는 우리나라와 비교해보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전반적으로 물이 부족할 뿐 아니라 그나마도 강수가 일시적이어서 경작이 어렵고 단초(짧은 풀)만이 자라는 광활한 초원 지대가 펼쳐진다.
셋째, 이 지역은 연중 기온교차가 극심하다. 위도상으로는 온대 지역이지만 북쪽의 추운 침엽수림 지대와 남쪽의 뜨거운 사막 지대 사이에 있어 영향을 받는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여름에는 영상 40℃까지 오르는 뜨겁고 건조한 날씨를 보이고, 겨울에는 영하 40℃까지 내려가는 곳이 많다. 극단적인 예로 여름에 영상 45℃, 겨울에 영하 55℃의 기록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일교차도 대단히 크다. 몽골 고원에서는 낮에 30℃에 달했던 기온이 밤에는 영하까지도 떨어진다. 유라시아 대초원의 이러한 지역적 특징으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정착해서 농경 생활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광활하고 풍부한 초지를 활용해 가축을 키우는 유목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례로 몽골 초원에서는 생활을 위해 한 가정이 200~300마리 이상의 양을 길러야 한다.
유라시아 대초원의 주인공, 유목민
유라시아 대초원에서 살아온 주인공들이 바로 유목민(nomad)이다. 이들은 농경 생활이 불가능한, 삶의 여건 자체가 대단히 어려운 엄격한 자연환경 속에서 유목 생활로 살아남았다. 유목민은 앞에서 살펴본 대초원의 환경으로 인해 한 곳에 정착해 살지 못하고 장소를 옮겨가면서 생활했다. 드넓은 목초 지대에서 말, 양, 소, 염소, 낙타 등과 같은 이동하는 데 적합한 가축과 함께 물과 목초지를 찾아서, 또 계절에 따라서 이동하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의 주인공이었다.
그들은 광활한 지역에서 가축을 사육하기 위해 초지가 풍부한 지역과 추운 계절을 이길 수 있는 지역을 찾아 가족이나 소집단을 이루며 끝없이 움직였다. 이 때문에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그의 저서 《역사Histories》에서 스키타이인에 대해 ‘농경민족이 아니라 유목민이다.’, ‘아시아에 살던 유목민이다’, ‘도시도 성채도 없이 그들의 집을 직접 끌고 다닌다’라고 썼다.
지금도 몽골, 투르키스탄, 중앙아시아 등지에서는 ‘게르(ger)’ 또는 ‘유르트(yurt’)(중국어로는 파오(包))라고 불리는 이동식 주택을 흔히 볼 수 있다. 대초원의 열악하고 엄격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유목민들은 ‘용감하고 유능한’ 독특한 인간 유형을 형성했다. 우선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용감해야 했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혜로워야 했다. 또한 대초원에서 가족이나 소집단을 이루어 독립적으로 유목 생활을 영위하면서 자연과 싸워야 했기 때문에 개개인들이 강한 자부심을 갖는독특한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었고, 사회 전체는 강한 자립심으로 무장하게 됐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가족이나 소집단으로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하면서 목축을 하지만 외부 침략 등이 있을 경우에는 즉각 단결하여 집단적인 힘을 발휘해왔다. 특히 걸출한 지도자가 등장하여 세력을 결집하고 외부 세력과 전쟁을 하게 되면 순식간에 집단화해 대규모 기마군단을 형성, 가공할 전투력을 발휘하였다. 이는 BC 8세기경에 흑해와 카스피해 연안 일대에 스키타이가 등장한 이래 지난 2500년에 걸쳐 전개된 유라시아 대초원의 역사가 입증하고 있다.
대초원의 역사를 써온 이들은 민족과 종족이 다양하게 혼재되었으나, 대체로 몽골 고원과 그 주변 일대의 ‘몽골인’, 만주, 한반도, 동부시베리아의 ‘퉁구스인’ 그리고 동·서투르키스탄과 서부시베리아 등지의 ‘투르크인’이 그 주인공들이라 하겠다. 크리스토퍼 벡위드는 “초기 중세 이후‘ 전통적 중앙 유라시아’라고 말할 수 있는 지역은 동서로는 압록강 유역과 도나우강 하류 사이, 남북으로는 히말라야 산맥과 북극지방 남부 타이거 숲 지대 사이였다. 중앙 유라시아 사람들은 세계 문명을 형성하는 데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라고 했다.
초원의 전투 집단, 기마군단 사람이 말을 타는 승마는 기원전 약 2000년경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되었다. 초원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유목민들이 말을 키워 이동수단으로 활용하면서 말은 그들 삶의 중심이 되었다. 지금도 몽골에서는 네 살경부터 말을 타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몽골 제국 시대에는 두 살 때부터 말에 익숙하도록 가르쳤다. 나무안장, 고삐와 재갈, 등자(발걸이) 등 마구의 등장은 유목민의 생활과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놓는 계기가 됐다. 말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게 된 이들은 생활과 사냥뿐 아니라 전투 목적으로 전장에서 활용하게 됐다. 강력한 성능의 복합곡궁, 기마전용 검등 무기가 개발되고 전투집단으로 변모하면서 기마군단이 출현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세계사는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됐다. 기마군단은 동서이동과 교역의 통로였던 초원 실크로드를 질주하며 그 전투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들 기마군단은 처음에는 중앙아시아, 몽골 고원, 동투르키스탄(중국의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 일대) 지역에서 세력화한 이후 급속히 동서양에 걸친 대초원 지역으로 확산했다.
수많은 정주민족 국가들을 정복하고 지배하면서 세계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기마군단의 가공할 전투력의 비밀은 다음과 같다.
첫째 비밀은 기동성이다. 기마유목민들은 나무안장과 등자를 발명하면서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말을 타고 생활해 오면서 말에 익숙했다. 말들도 비범했다. 몽골 고원을 비롯한 초원 지역에서 길러진 말들은 지구력과 순발력을 갖춘 강인한 말들이었다. 전시에 몽골 제국 기병은 병사 1인이 7~8기의 말과 함께 이동하고 전투하는 놀라운 기동력을 과시했다.
둘째, 복합곡궁이라는 강력한 활에 삼각철 화살을 장착하여 전투 무기로 활용했다. 나무와 동물 뼈를 접착하여 만든 이 활은 유효 사정거리가 150m 이상으로, 당시 기동력과 융합하여 공포의 기마군단을 탄생시켰다.
셋째, 기병이 착용한 전투용 갑옷은 철사를 엮은 쇠그물 형태로 매우 가볍고 강하게 제작되어 기동성과 전투력을 배가시켰다. 몽골 울란바토르의 몽골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철갑옷은 무게가 7kg에 불과해 중세 서양의 기병이 입었던 철갑옷 무게 70kg과 크게 비교된다. 한편, 가야고분에서 발굴된 4세기 초 기병의 철갑옷은 두께 1mm의 얇은 철판을 이어 만든 것으로 무게가 10kg 정도에 불과해 기마군단의 전투력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넷째, 병참 기능이 특별했다. 소나 말 등 육류는 건조시키고, 마유는 분말로 만들어 병사 각자가 가지고 다니며 전투 식량으로 활용했다. 소 한 마리를 말리면 작은 부피에도 군사 한명의 1년분 식량이 되었다. 물론 보조 식량이 있었겠지만, 쉽게 말해서 전투 식량을 자체 수송하는 병참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다섯째, 기마군단은 일찍이 십진법의 효율적인 군대 조직과 엄격한 기강으로 대규모 병력을 효율적으로 통솔할 수 있었다. 스키타이 이래로 이어지는 초원 제국은 모두 이 십진법의 군대 편성을 근간으로 했다.
여섯째, 뛰어난 전술이다. 기동성을 바탕으로 한 속도전과 널리 전략적으로 배치한 역참 등 광범위한 정보망에 공격과 후퇴를 반복하는 유연성을 더해 전투력을 극대화했다. 특히 초원 제국의 기마군은 파르티안 사법(Parthian Shot)이라는, 달리는 말 위에서 뒤를 향해 활을 쏠 수 있는 독특한 기술을 구사할 수 있어 적으로 하여금 공격과 후퇴를 가늠하기 어렵게 하여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이와 같이 기마군단은 17~18세기 총포 화기가 전쟁의 근본을 변화시켰던 근대 이전에 가장 효율적이고 강력한 기동군단으로서 전투력을 과시했다. 증기기관이 발명되기 이전, 말을 대체할 에너지원이 없었던 시절에 기마군단은 중국·유럽·중동 지역 등의 농업정착민 군대를 순식간에 압도하면서 공포의 존재로 각인되었고 동·서·중앙아시아 대초원 및 유럽을 무대로 역사를 써내려가게 되었다.
기마유목민 국가의 등장과 한민족 고대사
기마군단은 스키타이 이래로 만주, 몽골, 북중국, 러시아, 중앙아시아, 아나톨리아, 동유럽 등지의 스텝 지역에서 수많은 국가를 건설했다. 서쪽으로 진출한 나라들은 흉노, 훈, 돌궐, 위구르, 토번, 서하, 셀주크 투르크, 오스만 투르크 등으로 이어지고, 동쪽에서는 선비, 5호16국, 수, 당, 요(거란), 금(여진), 원(몽골), 티무르, 무굴, 후금(청) 등 수많은 초원 제국이 건설되었다.
스키타이, 흉노, 훈, 선비 등 AD 5세기 이전에 유라시아 대륙에서 활약한 기마유목 국가들은 자신들이 기록한 역사가 거의 없다. 그들로부터 정복 또는 침략당한 정주민의 기록 속에 남아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들 기록에는 왜곡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 기마군단이 건설한 국가들은 오랜 기간 세계사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고 그들만의 독특한 흐름을 뚜렷하게 남겼다. 유럽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초원로는 고대로부터 기마유목민의 이동 경로이자 문명 교류 통로의 역할을 해왔다.
선사 시대의 암각화, 고분군등 유적과 동물장식을 비롯한 청동기 유물 및 금장식품, 금관 등 금 문화유물은 이들이 공유해온 문화적 유산을 웅변해준다. 뿐만 아니라 서낭당, 솟대, 제천의식 등 초원 지대 곳곳에 남아있는 우리와 너무나 흡사한 풍습은 우리 겨레의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기마유목민이 건설한 국가들의 역사는 한민족의 역사와 깊은 관계에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찍이 《조선상고사》에서 몽골 고원에서 서쪽으로 진출한 투르크계 국가의 조상뻘이 되는 흉노가 3천 년 전에는 우리와 형제 동족이었고, 동쪽으로 진출하여 수 많은 강국을 건설한 여진, 선비, 몽골도 아(我)의 동족이라고 밝히고 있다.
BC 8세기 무렵부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이들 기마군단 국가들은 지역, 인종, 기질, 문화, 정서, 유물 등을 고려해볼 때 BC 2333년 건국된 고조선의 분파 과정과 연관하여 이해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유라시아 기마유목민족사의 흐름은 남의 역사로 치부해 버리고 실존했던 고조선이 역사에서 사라진 데 대해서는 크게 주목하지도 않으면서, 중국이 가져가는 고구려사에 대해서까지 관심을 쏟지 않는다면 진정한 한민족의 역사와 삶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2. 최초의 유목민 기마군단 ‘스키타이’
스키타이 기마군단의 출현
유목민의 기마군단은 2500년에 걸쳐 세계사의 중심 무대에서 주인공을 해왔으나 의외로 기록된 역사가 별로 남아있지 않다. 정주민에게는 토지 등 재산을 나누고 신분을 상속하는 것이 중요했으므로 일찍부터 기록 문화가 형성되었으나, 광활한 대초원에서 말을 기동력으로 자유롭게 이동하며 생활했던 유목민들은 삶의 형태가 달라 기록 문화가 취약했다.
남아있는 문자도 6~8세기경 발견된 ‘돌궐 문자’가 최초의 문자이며, 몽골 고원 오르혼 강가의 돌궐비문에서 발견되어 19세기에 와서야 해독되었다. 유목민이나 기마군단에 대한 기록은 그나마 중국과 서양에 남아있으나, 중국은 사마천의 《사기》에서부터 중국 중심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북방민족을 오랑캐라 치부해 그 역사를 폄하하였고, 서양은 기마유목민에 대해 잘 알지 못해 부실하고 왜곡된 기록을 남겼다.
중앙아시아 지역에는 일찍이 BC 12세기 무렵부터 유목민이 활동했고, BC 9세기 말경에는 말의 기동력을 활용한 전투집단이 등장했다. 남아있는 역사에 따르면 최초로 등장한 기마군단은 BC 8~3세기에 활약한 ‘스키타이’이다. 아시아 유목민의 기마군단이 남러시아 초원 지대에 진출하여, 통일된 중앙 집권형의 국가 형태는 아니지만 우크라이나와 중앙아시아 지역에 강대한 유목 부족의 공동체를 건설한 것이다.
스키타이 기마군단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기동력과 마상궁술을 무기로 드넓은 초원 지역에 산개하여 바람같이 나타나 순식간에 상대를 초토화시키는 위협적인 전술을 구사하면서 역사에 공포의 대상으로 등장했다.스키타이는 BC 7세기 전반에 흑해 동안에서 강력한 유목민 세력인 킴메르를 쫓아내고 이후 흑해 및 카스피해 북안과 서아시아 일대로 강대하고 넓은 세력을 형성했다.
BC 514년 페르시아 다리우스 대왕의 70만 대군(헤로도토스의 기록)을 제압했으며 BC 4세기경 전성기를 맞이했다. 스키타이는 흑해 연안에서 카스피해와 북부 돈강 및 볼가강을 건너고, 우랄 산맥을 넘어 몽골 고원 동부의 알타이 산맥 넘어 알타이 지역에까지 이르는 대교역로를 장악했다. 그들은 기마유목민 문화와 서방문화를 융합해 ‘스키타이 문화’라 일컬어지는 고유의 문화를 창출하고 동서 교역로를 통해 이를 전파했다.
동방 세계와 그리스 세력권을 연결한 이 동서교역로에서는 가축, 모피, 갑옷, 금속 제품, 장신구, 꿀, 황금, 청동기, 견직물, 올리브유, 포도주, 직물 등 다양한 물품이 오고 갔던 흔적이 남아있다. 수백 년간을 활약하던 스키타이는 BC 3세기경에 사르마트에 패해 쇠락하기 시작했고, 이후 크림반도 등지에서 농경 생활로 전환해 부족을 유지했으나 로마에 흡수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스키타이에 대한 역사 기록 스키타이에 대한 역사 기록은 아시리아 왕의 《연대기》에서 처음 나타나지만, 가장 중요한 기록은 BC 424년 이전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이다. 헤로도토스는 고대 그리스인으로 BC 485년 오늘날 터키 남동부 에게해 연안의 보드룸(Bodrum)에서 탄생했다.
대여행가로서 들은 대로, 전해지는 대로 기록하여 《역사》라는 역작을 남겼다. 키케로는 그를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사기》를 저술한 전한 시대의 사마천(BC 145년경 출생)보다 300년 이상 앞섰다. 그는 스키타이에 대해 “스키타이족은 아시아에 살던 유목민이었다.”, “그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쟁기질도 하지 않는다.”, “스키타이족의 나라에는 어디에도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가 아는 모든 부족들을 능가한다.” “그들이 추격하는 자는 아무도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무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들은 도시도 성벽도 없고, 집을 수레로 싣고 다니고, 말을 타고 활을 쏘기에 능하고, 농경이 아니라 목축으로 살아가는데 그런 사람들이 어찌 다루기 어려운 불패의 부족의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스키타이족의 나라는 정사각형인데 동서와 남북이 각각 4000스타디온(약 800km)이 된다”라고 썼다.
이외에도 《역사》는 스키타이의 동방교역로에 대해 소개하는 소중한 기록들을 담고 있다. 스키타이는 성경에서도 언급된다. 선지자 예레미아가 BC 629~588년에 기록한 구약 예레미야 6장은 “보라 한민족이 북방에서 오며 큰 나라가 땅끝에서부터 떨쳐 일어나나니 그들은 활과 창을 잡았고 잔인하여 자비가 없으며… 그들이 말을 타고 전사같이 다 항오를 벌이고 딸 시온 너를 치려 하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약의 경우 사도 바울은 AD 64년경 기록한 골로새서 3장에서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민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라고 적고 있다. ‘스구디아’가 바로 스키타이다. 사도 바울이 이 서신서를 쓸 당시 스키타이의 존재는 이미 미미해졌으나 그때까지도 서방 세계에 강력한 인상은 남아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수 있다.
스키타이 문화 유적
스키타이는 고대 오리엔트 문화에 그리스 문화를 접목해 고유의 기마유목 문화를 형성해서 동서 교류의 장을 열었다. 스키타이 문화는 초기 철기 문화로, 쿠르간kurgan이라는 고대 무덤이 흑해 북부를 중심으로 다수 발굴되면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1700년대 중반 이후 200여 년에 걸쳐 도나우강, 우크라이나, 카프카스, 드네프르강, 알타이로 이어지는 지역 등지에서 스키타이 시대 고분이 다수 발견되어 스키타이의 문화와 동서 교류를 증거하고 있다. 1939~1949년 구소련 조사단은 남러시아 알타이 지역의 파지리크강 계곡에서 BC 5~3세기경에 만들어진 거대한 무덤군을 발굴했다. ‘파지리크 고분군’이라는 이 무덤들은 매장 방법이나 무덤 조성 형태가 스키타이의 쿠르간과 같고, 무덤 속에서 발굴된 많은 유물들이 스키타이와 흡사하여 스키타이 문화의 동서 교류를 웅변한다. 이들 스키타이는 기념비적인 기마유목 문화를 유산으로 남겼고 이후 기마유목 국가로 이어졌다.
스키타이 문화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스키타이 문화는 거대한 고분 쿠르간으로 대표된다. 땅속의 목곽분 위에 돌무지를 덮고 다시 흙으로 덮은 무덤으로, 이러한 형태의 무덤은 중앙아시아와 내몽골 지역에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되고 있다. 무덤 속에서는 다양한 부장품이 발견되어 스키타이 문화의 연원이나 전파 경로를 말해준다.
② 스키타이인들은 황금을 숭배했다. 금으로 만든 제기, 장신구, 무기, 도구 등과 금박을 두드려 장식한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어 남아있다. 카자흐스탄과 신장 웨이우얼 북부 지역에서도 스키타이식 금동기구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몽골, 중앙아시아, 북중국 등의 박물관에서는 흉노·돌궐·몽골로 이어지는 기마유목민들의 황금장식 유물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③ 장식에서 동물 양식이 널리 사용되었다. 무기, 장식품, 장신구, 생활도구 등 다양한 용도로 동물 모양의 장식을 활용했다. 기마유목민들은 말과 더불어 살아갔고, 양, 염소, 낙타, 소는 그들의 생활과는 뗄 수 없는 존재이기에 이러한 동물 양식은 자연스레 그들의 ‘엠블럼’으로 자리 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등장하는 초원 제국에 서도 그 영향은 뚜렷하게 이어지고 있다.
④ 고분 등에서 발굴된 수많은 유물들은 스텝 지역 일대에서 살아온 유목민들의 생활과 관습 등을 잘 보여준다. 양면의 날을 가진 아카나케스 단검, 삼각철 화살, 활, 갑옷 등 전형적인 기마군단의 무기와 군장, 안장, 등자, 재갈 등 유목민들이 널리 사용했던 마구 및 스텝 지역 기마군단의 필수품인 청동으로 만든 솥(동복) 등은 기마군단과 유목민들의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또 무덤 등에서 나 타난 스키타이의 종교의식은 샤머니즘·토테미즘 형태로 추정되며, 북방민족의 유습이었던 순장 풍습도 있었다.
⑤ 바위에 새겨진 그림, 암각화가 스키타이 지역에서 대거 나타났다. 유목민이 본격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알타이는 중앙아시아 고원 지대로 몽골·중국·카자흐스탄·러시아 4국의 국경이 접하는 지역이다. 이 지역의 고대 도로는 수많은 민족의 이동 경로가 되었고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알타이 지역은 쿠르간, 석상, 고대 비문 등이 오래전부터 발견되고 있는데, 이 지역에서 다양한 양식과 기법의 암각화가 수백 군데에서 발견되고 있다. 알타이 암각화는 거슬러 가면 기원전 4000년경부터 나타나지만 청동기 시대 및 초기 철기 시대에 집중되어 있고, 초기 스키타이 시대(BC 8~6세기)의 암각화도 발견되고 있다. 이처럼 스텝 지역에 널리 분포된 암각화는 고대 유목민들의 생활상과 이동 경로를 보여준다.
스키타이와 초원의 기마국가와의 관계
스키타이는 BC 8~7세기경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 남부 지역으로 이주한 유목민족이다. 몽골 고원 서북부 러시아 영내 지역의 아르잔(Arzhan)에서 발견된 BC 9~8세기경의 쿠르간에서는 흑해 북안에서 발굴된 스키타이 전성기의 유물과 흡사한 유물들이 대거 발굴되었다. 이는 스키타이가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흑해 연안으로 이주한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스키타이인이 이란계라는 학설 등 여러 견해가 있었으나, 헤로도토스는 ‘아시아 유목민’이라고 단정했다. 알타이 지방에서 거주할 당시에는 몽골형의 모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언어를 통해 북방민족의 연원을 밝히고 있는 중국의 주학연 박사는 스키타이, 킴메르, 사르마트 등 유목민족에 대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는 이들이 이란계 종족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대량의 족명과 언어적 증거들은 이들이 몽골인종에 속한 중국 북방민족들이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라고 밝혔다.
스키타이는 최초로 대초원을 지배한 기마유목민 집단으로, 스키토-시베리아 문화는 이후 유라시아 스텝 지역 곳곳에서 나타난다. 스키타이는 이동성, 집단성, 전투력을 특징으로 하는 특유의 군사집단으로, 그들의 전술과 전법은 후대에 등장하는 기마유목민들의 국가인 흉노·선비·돌궐·위구르·몽골 등의 기마군단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뿐만아니라 유물, 유적에서 유추할 수 있는 스키타이의 생활양식 등 문화의 흔적은 이후 스텝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한반도와도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와의 관련성은 다음 세 가지를 통해 알 수 있다.
① 한반도 지역에서도 스키타이와 유사한 무덤 양식이 나타난다. 신라 시대 전기 지배층의 무덤 양식인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의 무덤 구조는 알타이 지역의 파지리크 무덤, 남부시베리아의 쿠르간, 카자흐스탄 쿠르간 등과 비슷한 구조이다. 고구려 무덤 양식인 ‘돌무지 무덤’도 윗부분에 봉토가 없다는 점이 다를 뿐 큰 차이가 없다. 경주 등지의 적석총(돌무덤)에서 발굴된 유물에서도 유목민족의 흔적을 뚜렷이 볼 수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5~2017년 사이에 카자흐스탄 동남부의 카타르토베 고분군을 조사하였는데, 스키타이 시대의 거대한 돌무지 무덤에서 우리의 고대 무덤과 축조방식이 나 구조 등에서 유사한 연결고리가 존재함을 확인한 바 있다.
② 신라의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금관을 비롯한 화려한 황금 문화는 스키타이 황금 문화와의 친연성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수년 전 서울에서 열렸던 ‘스키타이 황금문명전’에서는 신라를 비롯한 한반도의 황금유물과 맥이 이어지는 유물들을 볼 수 있었다. 스키타이 이후의 아시아 기마유목 국가들도 황금 문명의 전통을 이어왔다. 201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아프가니스탄의 황금문화전’에 서는 수많은 고대의 황금유물과 함께 구조나 모양새에서 신라금관과 흡사한 금관이 선보였다. 아프가니스탄 지역은 월지 등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활약하던 땅이다.
③ 울주군 천전리 암각화와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등 알타이 암각화와 관계가 있다고 보이는 다수의 암각화가 발굴되었다. 암각화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커다란 바위 등 성스러운 장소에 생활양식이나 정신세계를 새긴 그림을 말하는데, 이러한 암각화는 전세계적으로 북방문화전과 관련된 유적이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암각화는 우리 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알려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일찍이 서진하여 활약한 스키타이와 이어지는 흉노, 몽골 고원 동부에서 활약한 정통 고대 국가 체제의 기마국가인 고구려와 몽골 고원과 서부 지역에서 활약한 돌궐, 그리고 이들을 계승한 수많은 기마민족 국가들은 과연 어떤 관계였을까?
또 이들 국가 이전에 존재했던 고조선과 부여 등 한민족 고대 국가들과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보다 열린 시각으로 유라시아 역사와 세계사를 보면서 관심과 이해의 폭을 넓혀 나가야할 대목이다. 스키타이-흉노-한반도로 이어지는 문화적 친연성, 가야 지역인 김해 대성동 고분의 북방계 유물 등은 앞으로 깊은 관심과 많은 연구가 따라야 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출처: 한국NGO신문 http://www.ngonews.kr/115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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