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DNA를 찾아서 (2회) <흉노와 한민족은 어떤 관계인가>
김석동 ㅣ 기사입력 2020/01/20 [09:16]
<흉노 제국>
1. 유라시아 대초원에 등장한 최초의 스텝 제국 ‘흉노’
흉노의 등장
흉노는 원래 중앙아시아, 중국 북방 지역과 몽골 고원 서부 등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았다. 이들은 광활한 초원길을 장악하고 고대로부터 문명 교류의 장을 열었다. 흉노는 기원전 318년부터 중국의 역사서에 본격 등장하는데 요임금 이전에는 ‘훈육’, 주 왕조에서는 ‘험윤’이라고 했다가 진한(秦漢) 때부터는 흉노라고 불렀다고 한다.
사마천의 《사기》 <흉노열전(권110)>에 기록된 흉노의 연원에 관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흉노는 그 선조가 하후씨 후예로 순유(淳維)라고 불리웠고, 산융·험윤·훈육 등 여러 종족들이 물과 풀을 따라 옮겨 살았다. 그들은 성곽이나 일정한 주거지가 없고 농사를 짓지 않았으나 각자 나누어 갖고 있는 땅의 범위는 경계가 분명했다. 남자들은 자유자재로 활을 다룰 수 있어 모두 무장기병이 되었다. 따라서 평상시에는 목축, 사냥을 직업으로 삼고 긴급한 상황에는 전원이 군사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 싸움이 유리할 때에는 나아가고 불리할 경우에는 물러났는데 달아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이는 유목민의 기마군단 스키타이에 대한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기록들을 연상시킨다. 기마유목민은 정착민들과 달리 그 삶의 특성상 역사 기록이 취약하다. 흉노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들 자신이 기록한 역사 기록은 찾기 어렵다. 그래서 중국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중국의 흉노 기록은 기본적으로 적대 관계에서 남긴 것이어서 서술이 부정적이고 편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다.
춘추전국시대 중국북방 지역에는 흉노인들에 의해 거대한 유목민 사회가 등장했다. 흉노의 왕은 ‘탱리고도 선우(선우)’라고 불렸는데, 최전성기는 두만(頭曼)과 그의 아들 묵특冒頓(모돈, 묵돌) 시대였다. 두만은 태자 묵특을 폐하고 이복동생을 태자로 세우려고 묵특을 알타이 지역 동서 교역로의 중심부에 위치한 강국인 월지에 볼모로 보낸 후 묵특을 제거하기 위해 불시에 월지를 공격했다. 그러나 묵특은 가까스로 월지를 탈출하여 흉노에 돌아와 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는 장군이 됐다.
묵특은 소리 나는 화살(명적)을 만들어 자기가 먼저 명적을 쏘면 군사들이 그곳을 따라 쏘도록 명령했다. 묵특은 부하들을 철저히 훈련시켰다. 처음에는 사냥터에서 자신의 명령을 따라 쏘지 않은 자를 잡아 죽였다. 다음은 자신의 애마와 애첩에게 차례로 명적을 쏘았고, 차마 따르지 못한 자는 죽였다. 그런 후 두만이 타고 있는 말에 명적을 쏘았을 때 부하들은 다 따라 쏘았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두만 선우에 명적을 날려 그의 부하들이 두만을 죽이게 하고 묵특은 흉노의 왕이 됐다(기원전 209년).
당시 흉노와 더불어 세력을 떨치던 동호가 묵특에게 흉노의 보배 천리마를 달라고 청했다. 신하의 반대에도 묵특은 천리마를 보냈다. 동호는 다시 선우의 연지(후비) 중 한 명을 보내라고 했다. 신하의 반대에도 묵특은 연지를 보냈다. 그러자 동호는 흉노와의 사이에 있는 이천 여리의 버려진 황무지를 차지하겠다고 했다.
신하들은 줘도 좋고 안 줘도 좋다는 식으로 간언했으나 묵특은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 어떻게 그들에게 줄 수 있다는 말이냐.” 그리고 주어도 좋다고 한 자들은 모조리 참수한 후 동호를 공격하여 대파했다. 이어 월지, 연 등을차례로 공격하여 빼앗겼던 땅을 모두 회복했다.
<흉노는 어떤 나라인가>
흉노는 스키타이를 잇는 유목민의 기마군단으로, 기원전 4세기에 등장하여 기원전 3세기 말 몽골 고원을 통일해 최초의 스텝 제국을 건설했다. 기마유목민 국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흉노 제국은 기마군단의 가공할 전투력을 바탕으로 단기간에 대제국으로 발전했다. 흉노는 중국 최초 통일국가인 진(秦), 그리고 이어 한(漢)과 쟁패하면서 강대한 세력을 형성했으나, 중국 사서에 남은 기록만으로는 흉노의 실체를 알기 어렵다. 흉노의 실제 세력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기원전 4세기 후반 몽골 고원은 흉노, 동북 지역(만주)은 동호가 각각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국 시대에 흉노를 호胡, 그 동쪽 세력을 동 호東胡라고 불렀다. 흉노 기마군단의 등장은 보병을 주력으로 하는 정주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말의 기동력, 활의 파괴력, 강력한 금속 무기, 대초원을 무대로 전개하는 특유의 기마전술, 광활한 초원을 이어주는 정보망 등으로 대표되는 흉노의 전투력은 공포 그 자체였다.
특히 기마군단의 기동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몽골 제국 시대를 보면, 로마군은 하루에 20~30km를 진군했지만 몽골군은 60~100km를 진군할 정도로 비교 자체가 되지 않았다. 군대의 힘을 역학 공식인 ‘힘〓질량×가속도( f〓m×a)’를 빌려 가늠해보면, 기마군단의 전투력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는지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흉노는 전성기에 동쪽으로는 랴오허, 서쪽으로는 아랄해와 카스피해, 남쪽으로는 황하와 티베트 고원, 북쪽으로는 바이칼 호수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흉노 제국이 지배했던 영역은 600만 제곱킬로미터를 훌쩍 넘어섰다. 무엇보다 지배하는 땅이 넓어야 강대국이었던 시절이다. 기원전 6세기경 페르시아 제국이나 그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제국의 최대 영토는 600제곱킬로미터 안팎이며, 로마 제국의 최대 영토는 기원후 2세기 초 스페인, 터키, 북아프리카를 모두 포함해 650만 제곱킬로미터 정도였다.
중국이 가장 융성했던 한나라 한 무제 시대 최대 영토는 720만 제곱킬로미터였다. 이를 보면 흉노 제국의 세력을 능히 가늠해볼 수 있다. 흉노는 면적뿐 아니라 영향력에 있어서도 막강해 유라시아 양단에 강력한 흔적을 남겼다. 흉노는 진, 한 등 최강의 중국 왕조를 위협하면서 세력을 확장시켰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서진하면서 유라시아 양단에 걸쳐 역사를 바꿔놓았다. 흉노는 기마유목민이 세운 국가의 전형이 되었고, 이후 수많은 국가들이 유목민에 의해 탄생하게 됐다.
<흉노와 중국 왕조의 전쟁>
기원전 221년 진시황의 중국 통일 무렵, 두만의 지휘하에 부족을 통합한 흉노는 진을 위협하는 존재로 급부상했다. 이에 놀란 진시황은 몽염에게 30만 군사를 주어 흉노에 뺏긴 땅을 되찾고 만리장성을 쌓았다. 흉노와 접한 진, 조, 연나라 등이 쌓았던 기존의 성곽을 기반으로 한, 지구 최대의 건축물이라는 이 장성은 중국의 기마군단에 대한 공포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후 중국 역사는 장성을 사이에 두고 북방민족과의 대결이 지속되었다. 기원전 202년 황제로 즉위한 한 고조 유방도 바로 이 흉노와 전쟁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진에 이어 중국 통일을 이룬 유방은 북방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흉노를 정복하기 위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전쟁에 나섰다. 현재의 산시성 동쪽의 평성에서 공격에 나섰던 때는 겨울이라 매서운 추위와 눈이 엄습했다.
영특한 묵특은 패배를 가장해 한나라 군을 계속 유인했고, 한나라 보병 32만은 모두 추격에 가담했다. 이때 묵특의 정예부대 40만 기병이 백등산에서 유방을 포위했다. 보급과 구원병이 끊긴 절체절명의 순간 유방은 몰래 묵특의 아내 연지에게 후한 선물을 보내 구명운동을 했다. 이에 연지가 묵특에게 “지금 한나라 땅을 얻는다 해도 선우께서 가서 살 수도 없지 않느냐”고 설득하여 흉노 군은 한쪽 포위망을 풀어주었고, 유방은 장안으로 도망쳤다.
역사는 이를 ‘평성의 치’라고 한다. 이후 흉노와 한 사이에는 ① 한 황실 여인을 선우의 연지로 바친다. ② 매년 한이 비단, 솜, 식량 등을 바친다. ③ 형제의 맹약을 맺고 화친한다, 라는 내용의 한나라로서는 굴욕적인 조약이 맺어졌다. 그만큼 흉노의 세력은 막강했다. 흉노와 한의 화친은 60여 년간 지속되었고, 흉노는 기원전 176년 월지마저 정벌하고 북아시아를 완전 제패했다. 이후 한나라 7대왕으로 등극한 무제(기원전 140년~기원전 87년)는 굴욕적 화친에서 벗어나 흉노 정벌에 나섰다.
기원전 139년 장건을 서역에 파견하여 월지와의 연대를 모색하는 한편, 기원전 133년에는 흉노와의 결혼동맹을 파기하면서 전쟁상태로 돌입했다. 무제는 흉노에게 병력은 물론 영토, 경제력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결정적인 정벌은 이루지 못했으나, 이후 흉노의 세력은 분열되고 약화됐다.
한 무제가 죽은 뒤, 한과의 전쟁 중에 흉노는 질지가 이끄는 서흉노(기원전 56년), 호한야가 이끄는 동흉노(기원전 58년)로 분열됐다. 서흉노는 기원전 36년 역사에서 사라졌고, 동흉노는 다시 내몽골 및 화북 지역의 남흉노와 외몽골 지역의 북흉노로 갈라졌다(기원후 48년). 그 후 남흉노는 중국에 동화하였고, 북흉노는 후한과 선비의 공격으로 기원후 151년 멸망하면서 잔존 세력은 서쪽으로 이동했다.
<흉노를 보는 극과 극의 다양한 시각>
중국은 《사기》, 《한서》, 《전국책》 등에 흉노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북쪽 오랑캐로 잔인하고 두렵고 대적하기 어려운 공포의 집단으로 보았다. 진시황, 한 무제 등 국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도 흉노 침공을 제대로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마군단의 전투력을 무서워했고, 대응전술을 찾지 못했다.
만리장성이라는 대역사를 통해 흉노를 막아보려 했으나 바람 같은 기병의 진군을 약간 더디게 하는 효과밖에 없었다. 한 무제는 흉노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흉노의 말보다 더 빠르고 강한 말인 한혈마(장건을 통해 알게 된 대원에 있었던 붉은 땀을 흘리는 말)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대원 정벌에 나섰다.
이 원정에서 수만 명의 군사를 잃었으나 한혈마를 얻은 한 무제는 크게 만족했다 한다. 흉노 기마군단의 전투력에 대한 한 무제의 인식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중국의 한족 왕조는 오랫동안 북방민족을 두려워하고 적대시해왔으나 오늘날에는 고대의 흉노, 선비, 여진, 몽골, 거란 등의 북방민족이 중화민족의 일부라고 하면서 그들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 역사의 기본 골격으로 그동안 주장해왔던 ‘한족 중심주의’를 포기하고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으로 바꾼 결과이다. 이것이 중국 역사 공정의 출발점이다. 터키는 초등과 중등 역사 교과서에서 그들은 몽골 고원에서 유래한 투르크족의 후예로, 투르크의 최초 국가는 흉노이며 그 영역은 오늘날 만주, 몽골, 남시베리아, 북중국, 위구르, 티베트, 중앙아시아 지역에까지 이른다고 밝히고 있다.
또 동쪽의 흉노는 대흉노 제국, 서쪽의 훈족국가는 유럽 훈 제국이라 기술하고 있다. 중국의 《주서周書》 <돌궐열전>은 “돌궐은 대개 흉노의 별종이다”라고 하여 흉노와 투르크는 친연관계가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몽골에서는 중등 교과서에 흉노, 선비, 유연뿐만 아니라 투르크, 위구르, 키르기스, 거란까지도 몽골 영토상의 고대 국가로 규정하고 있다. 특히 흉노는 유목민이 몽골에 세운 최초의 국가로 정치 규범, 경제 생활, 문화면에서 기마유목 국가의 전형이 되는 강력한 대제국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흉노는 중앙아시아, 서북인도, 동유럽까지 진출했는데, 이중 유럽에 세운 나라가 훈 제국이라고 했다. 유럽에서는 흉노의 후예인 훈족의 습격을 받아서인지 흉노를 극도의 공포와 증오의 대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로마의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Ammianus Marcellinus)는 《사건 연대기》에서 “그들은 비록 그런 대로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야만적이다. 그들은 음식을 불에 굽지도 않고 음식에 맛을 내지도 않는다. … 자신의 허벅지와 말 등 사이에 끼워 넣어 따뜻하게 한 뒤에 그냥 먹는다. 그들은 집도 없다. … 그들은 산속을 유랑하며 어릴 때부터 배고픔과 갈증을 견디고 추위에 맞서는 법을 배운다. … 그들은 모두 밤낮없이 말 위에서 거래를 하고 말 위에서 먹고 마시며 말 등에 누워 잠을 자고 꿈을 꾼다. … 행동이 바람처럼 빨라 적들이 미처 발견할 틈도 없이 그들은 어느새 적의 진영 앞에 나타나 있다. … 그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전사들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유럽인들도 중국 한나라 사가들이 흉노에게 느꼈던 공포와 경외심을 그대로 가졌던 것이다. 이들은 훈족의 예기치 않은 유럽 침공이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과 이에 따른 유럽사의 대변혁을 초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흉노와 한민족의 연결고리>
우리의 국사 교과서에는 흉노에 대한 서술이 없다. 《한국사 신론》(이기백)에 ‘이방족속 흉노’라는 표현이 단 한군데 있다. 그러나 단재 신채호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흉노, 선비, 몽고는 아我에서 분리…, 여진, 선비, 몽고, 흉노 등은 본래 아(我)의 동족이었다, 흉노는 조선의 속민이었다”, “조선족이 분화하여 조선, 선비, 여진, 몽고, 퉁구스 등의 종족이 되고, 흉노족이 흩어져 돌궐, 헝가리, 터키, 핀란드 등의 종족이 되었다”라고 썼다.
윤치도의 《민족정사》는 “3대 가륵단군 시절에 요동태수 삭정을 징계하여 약수변에 유배하였는데 그들이 후에 흉노족이 되었다”고 했다. 위서 논쟁이 있지만, 《단군세기》는 3세 가륵단군 시대에 지방장관 삭정을 유배에서 풀어 약수지방에 봉한 것이 흉노의 시조라고 했다. 흉노와 한민족의 유적, 유물, 언어, 풍속 등에 있어 친연성을 추정할 단서는 여러 곳에 있다.
흉노의 문화와 전통을 가장 많이 나타내는 나라가 한국이라 한다. 그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 발굴된 고분들의 대표적인 형태는 적석목곽분으로 스키타이-흉노로 이어지는 북방민족의 무덤 양식일 뿐 아니라, 매장된 부장품 또한 이들의 친연성을 웅변하고 있다. 사적 제341호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4~5세기에 번성했던 금관가야가 소재했던 지역의 무덤으로, 3~6세기경의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이곳에서 북방민족과의 연관을 추측해볼 수 있는 유물인 토기, 마구, 갑옷, 투구, 철제무기 등이 다수 등장하여 세인을 놀라게 했다. 특히 청동솥인 동복이 발견됐는데, 동복은 잘 알려진 대로 북방민족의 전형적인 유물이며 특히 흉노의 주요 거점에서 발굴되는 유물이다. 6세기 초 무덤인 경주 금령총에서 1924년에 발굴된 기마인물형 토기에서도 말 뒤에 동복을 얹고 있는 모습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된 동복은 북방민족인 흉노가 한반도 남부, 가야, 신라 지역으로 이주했다는 가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둘째, 고대 북방유목민들에게는 금으로 치장하는 풍습이 널리 퍼져 있었고, 이는 알타이를 고향으로 하는 북방민족의 상징이었다. 알타이 지역은 지금도 중요한 금의 산지이다. 신라는 금을 세공하여 금관과 다양한 장신구를 만들었으며 세계적으로 동물형 장식 등 고대 금 세공 기술은 스키타이와 신라가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났다.
고대 한국은 금관의 나라라고 부를 만큼 우수한 기술로 금관을 제작했다. 고대에 금으로 왕관을 만든 것은 북방민족밖에 없다. 경주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신라금관은 영락없는 유목민 기마군단의 유산이다. 중앙에 우뚝 선 나무 형상, 양옆의 사슴뿔 형상, 그리고 관 상단의 새의 형상, 수많은 곡옥 등 금관 전체가 유목민의 엠블럼으로 그득하다.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었던 아프가니스탄의 금관도 형상과 구조가 신라금관과 흡사하다.
셋째, 가야와 신라에서는 고구려나 백제에는 없는 순장하는 풍속이 있었다.
왕의 시종이나 동물 등을 함께 무덤에 묻는 순장은 흉노 등 북방민족의 전통이었다. 뿐만 아니라 흉노는 다른 민족에 흡수되어 사라졌으나, 우리에게는 씨름, 언어, 습속, 의복, 풍습 등을 통해 그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한국어에는 북방 알타이계 언어들과 연결된 다수의 일상 어휘가 나타나며, 삼국 시대에도 왕을 뜻하는 간(干), 각간(角干) 등을 비롯한 관직명에서도 알타이계 명칭이 쓰였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혁거세’는 돌궐어로 통치자 즉, 천자(天子)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우리말에는 흉노어가 다수 남아있다는 연구가 있으며, 고대로부터의 연결고리인 암각화도 눈길을 끈다. 남부 시베리아의 스키타이 지역, 중앙아시아, 몽골 고원 그리고 한반도로 이어지는 곳곳에서 발견되는 바위에 새겨진 암각화에서 북방민족의 삶의 흐름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이렇게 북방민족 흉노와 한민족 사이에는 끊을 수 없는 연결고리가 많이 남아있다.
흉노 스스로의 문자 기록은 없으나 수많은 고고학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고 또 발굴됨에 따라 흉노가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점차 더 많이 밝혀질 것이다. 이와 함께 유목민에 대한 기록도 투르크, 위구르, 몽골, 만주, 티베트어 등으로 다수 발견되고 있어 앞으로 한민족을 포함한 기마민족의 활약상과 친연관계가 더욱 밝혀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 민족 형성에 흉노, 선비 등 북방계 민족의 비중이 크다는 논의도 검증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출처: 한국NGO신문 http://www.ngonews.kr/116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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