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보천교 증산도로 이어지는 후천개벽의 맥
東學 普天敎 甑山道로 이어지는 後天開闢의 脈
Ⅰ. 서론
Ⅱ. 동학의 참된 가르침
Ⅲ. 보천교주 차경석과 보천교
Ⅳ.동학과 보천교의 맥을 이은 증산도
Ⅴ. 결론
Ⅰ. 서론
최수운 대신사께서는 평소에 항상 도인들에게 “개벽 이후로 세상에 혹 상제를 친히 모시고 문답하고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있었느냐”고 하셨다. 1860년 4월 5일 대신사는 천상문답을 통해 우주를 통치하고 주재하시는 상제님[天主, 한울님]과 직접 대화를 하면서 천명을 받았다. 이러한 내용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의 곳곳에 나타난다. 특히 『도원기서』에 있는 대화의 내용 속에는 “너는 나의 아들이다.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해라.”, 수운 선생께서 “아버지”라고 부르자 상제님께서 “너의 정성이 가히 아름답구나.”하는 구체적인 내용까지 나온다. 동학의 출현은 우리 역사에서 근대사의 출발점이다. 더 나아가 우리민족과 세계 인류의 새로운 전기점을 마련한 획기적인 대사건이었다. 그러나 동학의 진면목은 이후 2세 교주 최시형과 3세 교주 손병희에 의해 왜곡되었고, 이를 계승한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더욱 왜곡되어 회복 불가능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본 논문의 목적은 왜곡되고 굴절된 동학의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먼저 수운 선생이 말한 상제上帝[天主, 한울님]는 인격적인 존재라는 것을 서술하였다. 그리고 동학의 핵심 가르침이 상제님께서 이 땅에 강세하시고 모든 인류가 시천주侍天主를 생활화하는 시대가 도래하며 괴질의 엄습과 후천개벽의 도래를 예고한 것임을 밝혔다.
수운 대신사께서는 무극대운이 열리고 무극대도가 나온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이야기 하였지만 기존의 동학 연구가들은 이에 대해서 명쾌한 해석을 하지 못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또한 이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을 하였다.
이어서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600만의 신도를 거느렸던 보천교주 차경석과 보천교에 대해 기술하였다. 차경석의 동학에 대한 인연과 증산상제님과의 만남, 상제님께서 그에게 내린 사명과 도수, 보천교 도세성장의 핵심인 60방주제도, 보천교의 몰락 등을 『증산도 도전』과 『보천교 교전』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차경석의 사명은 상제님 도운의 이종운移種運을 맡아 앞으로 오게 될 추수도운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동학과 보천교의 근본적인 공통점은 상제님의 뜻에 의하여 이 세상에 출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학을 이어 참동학 증산도가 출현하였고 보천교의 이종도운을 이어 추수결실 도운의 사명을 띄고 증산도가 출현하였다. 증산도가 왜 참동학이 되는지 그리고 동학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았고 이어서 보천교와 증산도의 관련성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동학, 보천교, 증산도는 증산상제님께서 의도하신 후천개벽을 준비하기 위하여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출현하였다.
참동학 증산도와 보천교의 맥을 이은 증산도의 관련 내용기술은 『증산도의 진리』과 『증산도의 진리』를 위주로 하였음을 밝혀둔다.
Ⅱ. 동학東學의 참된 가르침
1. 상제님으로부터 직접 천명을 받은 최수운 대신사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동학東學의 창립은 최수운(1824~1864) 대신사께서 1860년 4월 5일 하늘에 계신 상제님과의 천상문답天上問答사건으로부터 시작하게 된다. 이를 『동경대전東經大全』의 「포덕문布德文」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
1) 천도교중앙총부. 천도교 경전. 천도교중앙총부출판부. 포덕133년. pp18~20.
불의사월不意四月에 심한신전心寒身戰하여 질부득집증疾不得執症하고 언부득난상지제言不得難狀之際에 유하선어有何仙語 홀입이중忽入耳中하여 경기탐문즉驚起探問則 왈물구물공曰勿懼勿恐하라 세인世人이 위아상제謂我上帝어늘 여부지상제야汝不知上帝耶아 문기소연問其所然하니 왈여역무공고曰余亦無功故로 생여세간生汝世間하여 교인차법敎人此法하니 물의물의勿疑勿疑하라.
뜻밖에도 사월에 먀ㅏ음이 선득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집중할 수도 없고 말로 형상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어떤 신선의 말씀이 있어 문득 귀에 들리므로 놀라 캐어물은 즉 대답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시기를 「내 또한 공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그리고 같은 내용이 『용담유사龍潭遺詞』에서는 다음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사월이라 초오일에 꿈일런가 잠일런가
천지가 아득해서 정신수습 못할러라
공중에서 외는소리 천지가 진동할 때
공중에서 외는소리 물구물공 하였어라
호천금궐 상제님을 네가 어찌 알까보냐. (안심가)
천은이 망극하여 경진사월 초오일에
글로어찌 기록하여 말로어찌 성언할까
만고없는 무극대도 여몽여각 득도로다. (용담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는 우주의 주재자에 대한 호칭으로서 상제上帝, 천주天主, 한울님 등의 명칭이 나오는데 모두 같은 의미로 보아야 한다.
上帝와 天主의 명칭은 한문경전인 『동경대전』에서 주로 나타나고, 한울님은 한글가사인 『용담유사』에서 전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위의 천상문답에서 상제님께서 머무시는 곳이 호천금궐이며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의 말씀을 통해
첫째, 상제님은 우리민족의 뿌리문화인 신교에서 받들어온 삼심상제님이며.
둘째, 모든 종교에서 우주의 절대자로 받들어온 하느님, 천주님, 옥황상제님이며. 셋째, 이제 모든 인류는 무엇보다도 먼저 상제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선언해 주셨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수운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 계신 상제님으로부터 성령을 받고 도통을 하신 것이 아니다.
1855년 을묘년 천서天書사건을 통해 신인神人으로부터 책을 전해 받았고 “그 후 깊이 연구하여 그 이치를 꿰뚫어 보니 곧 이 책은 기도의 가르침을 담고 있었다.” 2)-윤석산역주. 도원기서. 모시는 사람들. 2012. p18-의 내용에 따라 33세가 되는 1856년 병진년에 양산에 있는 천성산天聖山 원적암圓寂庵에 들어가 삼층으로 단을 쌓고 하늘에 기도를 하였으며, 34세가 되는 1859년 정사년에 고향인 경주 용담으로 돌아오면서 이름도 제선濟宣에서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을 모두 구제하겠다.’는 의미로 제우濟愚로 개명하였으며, 방안에 불출산외不出山外의 글귀를 써 붙이고 세상을 올바르게 제도할 도를 깨닫지 못한다면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수련에 맹진한 결과였던 것이다.
『도원기서道源記書』에는 천상문답의 과정 속에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었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다. 3)-윤석산역주. 도원기서. p24. p174.
상제우왈上帝又曰 여汝는 오자吾子니 위아호부야爲我呼父也니라 선생先生이 경교호부敬敎呼父하시니 즉상제왈則上帝曰 여성汝誠이 시가가是可佳라.
상제 또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의 아들이다.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해라.” 선생이 곧 공경스럽게 가르침을 받아 아버지라고 불렀다. 상제 말씀하시기를 “너의 정성이 가히 아름답구나.”
위의 내용은 상제님께서는 인간과 신명뿐만 아니라 만유생명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며 또한 상제님과 대신사와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라 사료된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과 선천시대의 성자와의 관계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즉 하느님(상제님)의 일을 대행하는 자는 하느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위의 내용은 이 뿐만 아니라, 후세의 학자들이 천상문답사건을 최수운의 개인적인 종교체험으로 폄하하거나 상제上帝를 비인격신非人格神으로 왜곡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반론과 증거가 된다. 환상적 체험이 아니라 실제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많은 학자들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 나오는 상제를 비인격신非人格神으로 왜곡하고 있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상제는 동양의 도교적인 주재신을 일컫는 말이다. 유교에 있어서는 우주자체가 자율적인 존재이지 별도로 이 우주를 주관하는 신이 있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4)-윤석산. 동학대전. 동학사. 1996. p22.
하늘님은 인간과 별개로 존재하는 외적 존재가 아니다. 기연의 눈으로 본다면 주체가 하늘이고 ‘나’는 주체를 모시는 존재에 불과하나, 불연의 눈으로 본다면 하늘님은 모시는 존재가 곧 하늘님이다. 불연의 눈으로 본다면 하늘님은 ‘내’안의 존재이다. 5)-오문환. 사람이 하늘이다. 솔. 1996. p58.
하늘님이라 이름하는 것은 달리 이름할 수 없기에 하늘님이라 이름하는 것이지 이름으로 포착될 수 있는 어떤 실체적 존재를 칭하는 말이 아니다. 6)-오문환. 사람이 하늘이다. p66.
동학의 신관은 인격신관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해월과 의암에 이르러서는 점차 인격신관의 의미가 작아지고 만물 안에 있는 한울님 즉 비인격적 신관 혹은 인즉천人卽天 신관으로 발전한다. 7)-김용해. 수운최제우. 예문서원. 2005. p236.
위의 내용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윤석산은 상제上帝는 도교의 주재신으로 천상문답의 주인공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유교에서는 우주를 주재하는 신神이 있다고 보지를 않기 때문에 위의 상제는 비인격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주장으로 원시유교 경전인 『시경』, 『서경』, 『주역』 등에서는 인격적인 상제님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김용해의 해석은 대단히 정확하다. 수운의 상제인식은 분명한 인격신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월 최시형과 의암 손병희에 이르러 비인격신으로 왜곡되어 사물속에 존재한다는 물즉천物卽天 사람이 한울님이라는 인즉천人卽天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전우주全宇宙를 신神으로 보는 범신론汎神論과 신神이 우주宇宙를 주재主宰하는데 관여하지 않는다는 이신론理神論, 내가 하늘님이고 하늘님이 내 안에 존재한다는 인내천론人乃天論 등 상제님을 비인격신으로 보는 모든 상제관上帝觀은 최수운이 문답한 상제上帝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잘못된 주장들이다.
2. 인류의 뿌리문화인 신교神敎를 부활시킨 동학東學
신교神敎는 고조선 이전의 환국·배달국 시대부터 북부여·고구려·대진국까지 우리 민족이 국교로 받들어온 생활문화이며 뿌리문화이다. 또한 유교·불교·도교·기독교 등 기성종교의 근원이 되는 시원종교(ur-religion)이며 동서인류의 원형문화였다.
신교神敎는 『규원사화』의 ‘이신설교以神說敎’, 『환단고기』의 ‘이신시교以神施敎’의 준말로써 ‘매사를 신도神道로 가르친다.’ ‘신神으로써 인간 교화의 중심을 삼는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신교神敎의 중심에는 우주를 주재하시고 통치하시는 한 분의 상제님이 계시는데 우리민족은 이 분을 삼신상제님이라 불렀다. 삼신이란 세분의 하느님이 계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신一神이 현실세계에서 세 가지 신성神性으로 작용한다는 뜻이다. 곧 만물을 창조해 내는 아버지[父]의 역할을 하는 조화신, 인간과 만물을 가르치는 스승[師]의 역할을 하는 교화신 그리고 인간과 만물을 성숙시키고 각자 제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다스리는 임금[君]의 역할을 하는 치화신으로서의 역할을 하신다는 것이다.
신교神敎의 주된 행사는 삼신상제三神上帝를 모시는 제천의식祭天儀式이다. 우리 민족은 소도蘇塗라는 신성한 지역을 정하여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축제를 즐겼는데 이것이 고구려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迎鼓, 동예의 무천舞天, 중삼한中三韓 시대의 상달제 등이다.
신교神敎의 가르침 속에는 유불선의 모든 이념이 종합되어있다. 일찍이 최치원은 화랑도의 뿌리를 밝힌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서 우리민족에게는 유불선 삼교의 정신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풍류도風流道가 있었다고 하였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만물을 움직이게 하는 조화의 근원이니 풍류도는 곧 신교의 다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8)-風流道: 『삼국사기』 진흥왕 37년조에 “國有玄妙之道하니 曰風流라. 設敎之源이 備詳仙史하니 實內包含三敎하야 接化群生이라.”하였다.
최수운은 무왕부득無往不得하는 순환의 이치 속에서 선천종교의 운이 끝나고 이제 새로운 진리와 가르침을 한울님으로부터 당신이 받았다는 것을 “유도불도 누천년에 운이역시 다했던가 윤회같이 둘린운수 내가어찌 받았으며. (교훈가)”라고 노래하였다.
또한 1863년 계해년 8월15일 추석날에 당신의 도가 유불선 삼도를 겸하여 나온 것임을 다음과 같이 밝혀주셨다. 9)-윤석산역주. 도원기서 p49.
15일 이른새벽에 선생이 경상을 불러 말하기를,
“이 도는 유·불·선 세 도를 겸하여 나온 것이다.”하니,
경상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어찌하여 겸해진 것입니까?”
“유도儒道는 붓을 던져 글자를 이루고, 입을 열어 운韻을 부르고, 제사에 소와 양을 쓰니, 이에 유도와 같다고 한다. 불도佛道는 도량道場을 깨끗이 하고 손으로는 염주念珠를 잡고, 머리에는 흰납白衲을 쓰고, 등燈을 켜니 이에 불도와 같다고 한다. 또 선도仙道는 용모를 바꾸어 조화를 부리고 의관衣冠은 채색이 있는 것을 입고, 제사를 지낼 때는 폐백幣帛을 쓰며 예주醴酒를 올리니, 이에 선도와 같다고 한다. 우리 도는 때에 따라 그때그때 알맞은 제례祭禮의 방법을 따른다.”
위의 내용은 유불선의 운수가 끝나면서 당신의 도道가 나오게 되었고 당신의 도道는 유불선의 삼도三道를 모두 가지고 있음을 밝힌 내용이다.
수운이 신교를 회복한 내용을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교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상제신앙을 회복한 것이다.
나는 도시 믿지말고 한울님만 믿었어라
내 역시 바라기는 한울님만 전혀믿고. (교훈가)
그말저말 다던지고 한울님을 공경하면
아동방 삼년괴질 죽을염려 있을소냐 (권학가)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한울님과 상제上帝, 천주天主는 모두 같은 의미이다. 수운은 신앙의 대상을 자신이 아닌 한울님[상제上帝]이라고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동학의 본 주문에 있는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의 천주天主가 바로 상제上帝로 앞으로 모든 인류는 천주님을 모시는 일을 생활화하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둘째, 신교神敎의 주요행사인 제천의식祭天儀式을 거행하였다. 이에 대해 윤석산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10)-윤석산. 동학교조 수운최제우. 모시는 사람들. 2006. p146.
또한 수운 선생은 자신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모여든 자신의 제자들과 어울려 시문을 읊으며, 때로는 달 밝은 밤이면 산정에 올라 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때 지냈다는 ‘제’가 ‘제수식’의 하나인 천제라고 생각한다. 기록에 의하면 돼지고기와 국수, 떡, 과일 등을 준비하여 산에 들어가 천제를 지내고 또 검무를 추었다고 한다.
고종 원년 갑자년 2월 29일 경자일의 『일성록日省錄』 기록에도 ‘입산천제’이라 하였고 선전관 정운귀鄭雲龜의 「서계書啓」에도 ‘설단제천設壇祭天’했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에 천제를 올릴 때 읽었던 축문은 지금도 『천도교 경전 天道敎 經典』에 「축문祝文」으로 전해지고 있다.
셋째, 신교의 핵심에 해당하는 선仙과 장생長生에 대해서 대단히 많이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중 몇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有何仙語 勿入耳中 (포덕문)
吾有靈符 其名仙藥 (포덕문)
汝亦長生 布德天下矣 (포덕문)
무위이화 될것이니 지상신선 네아니냐 (교훈가)
선풍도골 내아닌가 좋을시고 좋을시고 (안심가)
금수같은 너의몸에 불사약이 미칠소냐 (안심가)
나도또한 한울님께 신선이라 봉명해도 (안심가)
내가또한 신선되어 비상천 한다해도 (안심가)
나도또한 신선이라 이제보고 언제볼고 (몽중노소문답가)
수운은 신교의 도맥道脈에서 선맥仙脈을 부활시켜 증산상제님께서는 그를 후천 선도仙道의 종장宗長으로 임명하셨으며(증산도 『도전』 4:8:2) 또한 최수운을 초혼하여 선仙의 기운이 갈무리되어있는 순창 회문산의 오선위기혈五仙圍碁穴에 장사를 지냈다(증산도 『도전』 5:399:4). 선仙은 인간이 건강하게 살게 하고 무병장수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선仙의 부활은 인류의 미래에 건강하고 장수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시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선지조화(증산도 『도전』 2:150:2)라 하였듯이 조화문명시대가 열릴 것을 예시하고 있는 것이다.
3. 상제上帝님의 지상강세와 시천주侍天主 시대의 도래를 선언
1) 상제上帝님의 지상강세 선언
최수운은 『용담유사』를 통해 상제님의 강세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하원갑 지내거든 상원갑 호시절에
만고없는 무극대도 이세상에 날것이니
너는또한 年淺해서 억조창생 많은백성
태평곡 격양가를 不久에 볼것이니
이세상 무극대도 전지무궁 아닐런가. (몽중노소문답가)
동양에서는 60갑자를 가지고 해를 표시하고 있고 천지지리는 삼원임으로 180년을 셋으로 나누어 上元甲子·中元甲子·下元甲子라 표시한다. 수운이 살았던 1804년 갑자년부터 1863년 계해년까지는 下元甲이 끝나고 1864년 갑자년부터 1923년 계해년까지 다시 上元甲이 시작된다.
수운은 이 상원갑의 시기에 만고에 없는 무극대도가 이 세상에 나올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증산상제님께서는 “너의 동토東土에 인연이 있는 고로 이 동방에 와서 30년 동안 금산사 미륵전에 머무르면서 최제우에게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주었더니 조선 조정이 제우를 죽였으므로 내가 팔괘 갑자八卦 甲子에 응하여 신미(辛未: 道紀 1. 1871)년에 이 세상에 내려왔노라(증산도 『도전』 2:94:6~7).”라고 말씀해 주셨다.
최수운대신사는 1864년 갑자년 3월 10일 대구 장將臺에서 순도殉道를 하셨고 이해부터 8년이 지난 1871년 신미년에 증산상제님께서 탄강하시어 이 땅에 무극대도를 선포하셨다. 대신사는 대구 장대에서 처형당하기 직전에 “전 40년은 내려니와 후 40은 뉘련가 천하의 무극대도가 더디도다 더디도다. 8년이 더디도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 11)-안경전. 증산도의 진리. 상생출판. 2015. p83.
전 40년은 수운선생 당신의 나이(1824~1864)를 말한 것이고 후 40은 강증산 상제님의 성수(1871~1909)를 개략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2) 시천주侍天主시대의 도래를 선언
대신사는 상제님과의 천상문답을 통해 상제님으로부터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라는 13자의 본주문과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라는 8자의 강령주문降靈呪文을 받는다.
본주문에서 시상제侍上帝라 하지 않고 시천주侍天主라고 한 것은 마테오 리치가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지으면서 천주는 기독교의 하느님으로 정착이 되어 동서양의 하느님관을 통일하려는 뜻도 있다고 사료되며 천지를 음양적으로 볼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 주님의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는 뜻도 있다고 사료된다.
이 주문은 인류자적인 의의를 넘어 우주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제까지 인류는 자기를 낳아준 생명은 뿌리인 부모님을 알고 살아왔지만 만유생명의 근원에 계신 천지부모님을 잊고 살아왔다. 이 주문은 천지부모님에 대한 의식을 각성시켜 준 것이다. 더 나아가 아버지 하느님을 올바로 모시는[侍] 길이 인간이 반드시 실천해야 될 길이며 성공의 길이라는 것을 밝혀준다.
天主님을 올바로 모실 때 造化가 정해진다는 것이다. 또 ‘천주님을 모시고 조화를 정한다.’고 보면 성사재인成事在人의 과정을 이야기 한다고도 볼 수 있다. 여기서 조화는 후천 5만년 조화선경시대로 볼 수도 있고 인간의 신성이 개발되어 신통묘용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조화도통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는 시천주侍天主에 비례하여 조화造化가 열린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영세불망만사지’는 侍天主 造化定을 영원히 잊지 않고 실천해 나가면[永世不忘] 萬事知하는 은혜를 누릴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후천세상을 맞이하여 모든 인간이 세상의 모든 일을 알게 되는 도통의 은혜를 받게 되는데 천주님께서 萬事知하게 해주신 은혜를 영원히 잊지 말고 보은해야한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지기금지원위대강’의 강령주문은 이제 후천개벽기를 맞이하여 무극대운이 열리니 지극한 천지의 기운, 천지의 성령기운을 크게 내려주시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증산도 도전』에서는 이 주문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2)-증산도 도전편찬위원회. 증산도 도전. 대원출판사. 2003. p198.
“이 본 주문과 강령주문에는 동서고금의 모든 진리주제가 다 들어있다. 천주사상·조화사상·지기사상·만사지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때 후천선경세계에 대한 대도의 안목을 가질 수 있다.”
증산상제님께서는 “동학 주문에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 하였으니 나의 일을 이름이라(증산도 『도전』 3;184:9).”고 말씀해 주셨다. 상제님의 시천주주侍天主呪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侍天主呪는 천지 바탕 주문이니라. 시천주주에 큰 기운이 갊아 있나니 이 주문을 많이 읽으면 소원하여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느니라. (『도전』 2:148:1~2)
위의 말씀은 시천주侍天主라는 것이 우주의 주재자 하느님을 모시는 것임으로 하느님을 올바로 모실 때, 아버지 하느님의 성령을 받을 때 인간이 소원하는 성공·도통·구원의 은혜를 모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증산상제님의 무득대도의 계승자인 태모 고수부님께서는 “시천주주侍天主呪는 천명을 받는 무극대도無極大道의 본원주本源呪이니 상제님을 지극히 공경하고 내 부모와 같이 모시라는 주문이라(『도전』 11:180:5).” 하셨고 대신사께서도 「교훈가」에서 “열 석자 지극하면 만권시서 무엇하며”라고 하시어 시천주주를 지극정성으로 외우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 이상의 영적인 성숙이 이루어진다고 말씀해주셨다.
수운에게 있어 上帝, 天主, 한울님은 인격적인 존재로서 믿고 모시고 공경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런데 수운의 도를 계승한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은 侍天主를 養天主라 하여 내 몸에 내재한 한울님을 모시고 길러야 한다고 왜곡하였다. 그는 “한울을 養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한울을 모실 줄 아느니라(해월신사법설海月神師法說·양천주養天主)”고 하였고, “나도 오장이 있거니 어찌 탐욕 하는 마음이 없으리오마는 내 이를 하지 않는 것은 한울님을 봉양[양천주]하는 까닭이니라(해월신사법설海月神師法說·대인접물待人接物)”하였으며, 또 “사람이 바로 한울이니 사람섬기기를 한울같이 하라(人是天이니 事人如天하라)(해월신사법설海月神師法說·대인접물待人接物)”고 하였다. 이는 天主가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다고 왜곡한 것이다. 또 기존의 제례의식인 향벽설위向壁設位를 조상의 心靈과 血氣와 精神이 나에게 남아있다 하여 향아설위向我設位로 변경하였다.
해월의 天主 왜곡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천지만물이 다 한울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天地萬物이 皆莫非侍天主也니라)(해월신사법설海月神師法說·영부주문靈符呪文)”고 하여 物物天 事事天의 汎天論的 天主觀과 汎物論的 天主觀으로 더욱 변질시켰다.
그의 “사람이 바로 한울이요 한울이 바로 사람이니 사람밖에 한울이 없고, 한울 밖에 사람이 없느니라(人是天 天是人이니 人外無天이요 天外無人이니라)(해월신사법설·천지인·귀신·음양)”는 그를 이어 손병희가 3대교주가 되어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천도교의 종지가 ‘인내천’임을 선포하면서 우주를 주재하고 통치하는 인격적인 上帝와 天主의 개념은 동학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리게 되었다.
해월신사법설의 대인접물待人接物에서 “도가의 부인은 경솔히 아이를 때리지 말라. 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니 한울님이 싫어하고 기운이 상하느니라.” 하였다.
이에 대해 증산상제님께서는 1908년 손병희가 서울의 교당을 짓기 위해 전주에 와서 모금을 할 때 ‘人乃天’이 사설邪說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밝혀 주셨다.
“누구든지 몽둥이를 들어 그 머리를 치며 ‘네 재능이 무엇이건대 사설邪說로써 민중을 속이며 부하들을 그다지 망치느냐!’고 꾸짖으면 대답하지 못하고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에 한 성도가 “손병희가 어떤 사설을 퍼뜨려 행세한다는 말씀이옵니까?” 하고 여쭈니 말씀하시기를 “天은 天이요 人은 人이니 人乃天이 아니니라. 또 손병희가 ‘아이를 때리는 것(打兒)’을 ‘하늘을 때리는 것(打天)’이라고 이르나 아이를 때리는 것은 아이를 때리는 것이요. 감히 하늘을 때린다고 할 수 없느니라. 하물며 사람의 생사와 화복이 하늘에 달려 있거늘 어찌 하늘을 때린다 하리오. 하늘은 억조창생의 임금(君)이요 억조창생의 아버지(父) 되나니 옛 성현들이 하늘을 모시는 도가 지극히 엄숙하고 지극히 공경스러워 통통속속洞洞屬屬하고 수운의 하늘을 모시는 가르침이 지극히 밝고 정성스러웠느니라. 큰 근본(大本)이 어지러워지면 만덕萬德이 모두 그르게 되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5:233:6~14)
최시형과 손병희의 왜곡된 天主觀을 계승하여 후대의 대부분의 동학연구자들은 인격적인 上帝, 天主의 개념을 희석시키고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해석하거나 범신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람은 원래 한울로서 사람이 된 것인 고로 즉 인내천인 고로 사람의 마음이 곧 한울이라는 뜻이다.13)
*13) 이돈화-천도교창건사, 천도교 중앙종리원. 1933. P24~25
동학의 한울님은 인간의 머리 위에 높이 떠 있는 하늘이라는 초월적 공간에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즉 동학의 한울님은 수운 선생이 내놓은 ‘시천주’가 뜻한 바와 같이 ‘내 안에 모셔져 있으며 동시에 이 주에 편만해 있다. 14)
*14) 윤석산. 동학교조 수운최제우. P204.
이들의 주장은 수운의 본래의 사상이 아니라 해월과 의암에 의해 왜곡되고 변질된 천주관天主觀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4. 무극대도無極大道의 도래를 선언
『동경대전』, 『용담유사』, 『도원기서』 속에는 無極之理, 無極大道, 無極之運 등 無極이라는 말이 대단히 많이 등장한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릇 천지의 무궁한 수와 도의 무극한 이치가 다 이글에 실려 있다.
凡天地無窮之數와 道之無極之理가 皆載此書라.(논학문)
천운과 순환하여 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로써 오만년 무극의 도를 나에게 명하여 내린 것이다.
天運이 循環하야 無往不復일새 以五萬年無極之道를 命授於吾라.
『도원기서』 15)*윤석산 역주. 『도원기서』 p53. p184.
꿈일런가 잠일런가 무극대도 받아내어(교훈가)
어화세상 사람들아 무극지운 닥친 줄을 너희 어찌 알까보냐(용담가)
무극대도 닦아내니 오만년지 운수로다(용담가)
이 세상 무극대도 전지무궁 아닐런가(몽중노소문답가)
만고없는 무극대도 여몽여각 받아내어(도수사)
무극대도 닦아내어 오는 사람 효유해서(도수사)
만고없는 무극대도 이세상에 창건하니(권학가)
무극대도의 특징에 대해 대신사께서는 “우리 도는 지금도 듣지 못하고 옛적에도 듣지 못하던 일이요 지금도 비교하지 못하고 옛적에도 비교하지 못하는 법이라(吾道는 今不聞古不聞之事요 今不比古不比之法也라.)(논학문)”고 찬탄하였다.
이어서 무극대도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무극이란 말은 태극, 황극과 함께 우주를 잡아 돌리는 3개의 본체 중의 하나이다. 무극은 만유생명의 근원자리로써 현실세계를 창조하는 뿌리이다. 무극은 태극이 창조되기 이전 자리임으로 1태극보다 더 근원자리인 0무극이라 한다.
무극은 이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에서도 작용하는데 이를 10무극이라고 한다. 이들을 구분하기 위해 0무극을 본체무극[본원무극]이라 하고 10무극을 현상무극이라고 부른다. 황극의 작용에 의해 분열의 극에 이르게 되면 만물은 10未土의 기운에 의해 성장을 중지하고 수렴과 통일의 과정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 10未土를 무극이라고 부른다. 이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류문명사를 관통하는 질서의 틀을 알아야만 한다. 소강절은 원회운세론을 확립하여 우주가 129,600년을 주기로 순환한다고 하였다. 이를 증산도의 안운산 태상종도사께서 우주1년의 도표를 만들어 우주변화의 선후천관을 체계화하였다. 129,600년의 우주1년은 다시 춘하추동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인간이 지상에서 살 수 있는 시간은 봄여름의 선천 5만년과 가을의 후천 5만년이다.
우주1년 창조이법 : 선·후천 개벽운동
선후천이 교대하는 하추교차기에 10未土의 기운을 가지고 우주의 주재자께서 이 땅에 오시어 선천 5만년의 역사를 매듭짓고 후천 5만년의 새로운 세상을 여시게 된다. 이때 열리는 후천 5만년을 무극대운이라 하고 인간으로 강세하신 상제님께서 새롭게 내어 놓으신 진리가 무극대도이다.
이를 몇 가지로 나누어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무극대도는 無極帝이신 上帝님[천주, 한울님]ㄲ세서 직접 내어 놓으시는 궁극의 진리이다. 하느님은 현실세계를 창조하는 근원에 계시고 道의 본원자리에 계시며 道의 주재자가 되기 때문에 三極에서는 無極에 배합하여 무극상제님, 무극제라고 부른다.
선천의 종교는 성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진리이다. 무극대도는 성부하느님에 의해 만들어진 대도진리로 모든 인류를 구원의 대상으로 삼는 하느님의 대도이다.
둘째, 무극대도는 후천시대 가을의 대도이다. 가을이라는 것은 초목이 열매를 맺고 완성이 되듯이 인간이 성숙하고 문명이 대진大進하여 이루어지는 조화낙원시대이다. 무극지운이라는 것은 바로 가을철 5만년의 후천시대 운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주의 가을철에는 인간으로 오신 상제님께서 그 운수를 주재하여 인간의 삶 속에 선천시대와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문명을 열어 놓으시는데 이러한 후천의 대도를 무극대도라고 부른다.
셋째, 무극대도는 모순과 대립이 없는 상생과 조화의 대도이다. 極이라는 말은 남극, 북극, 동물극, 식물극 등처럼 하나의 치우친 극단을 이야기 한다고 볼 수도 있다. 무극대도란 이러한 편벽된 기운이 없어지고 상극과 갈등이 무극이화無極而化로 해소되어 사랑과 평화가 충만된 새진리이다. 선천시대는 상극의 대립 속에서 민족간, 종교간, 국가간, 이념간에 모순과 대립이 그치지 않아 싸움과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이제 후천 무극시대를 맞이하면서 하느님의 도법에 의해 하나의 이념으로 통일된 새시대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러한 상생과 조화의 대도를 무극대도라 한다.
넷째, 무극대도는 선천의 모든 진리가 종합되고 통일된 진리이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열리는 후천무극시대는 10무극이 현실 속에서 열리는 현상무극이다. 10이란 수는 1水, 2火, 3木, 4金이 합해진 수로 동서남북, 춘하추동, 水火木金이 合一된 숫자이다. 10이란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 인간과 만물을 조화시키는 하느님 수이다. 10무극대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이를 하나로 조화하고 통일한 완성된 진리이다. 『도원기서』에서 수운은 당신의 도가 “儒彿仙三道”를 겸한 도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무극대도는 종교의 합일을 넘어서서 과학과 철학까지가 하나로 조화된 통일의 대도이다.
다섯쌔, 무극은 道의 본원자리이다. 그리고 10을 우리말로는 ‘열’이라고 한다. 열이라는 의미는 열린다[Open]는 뜻이다. 따라서 무극대도라는 것은 도의 근원, 도의 뿌리, 진리의 바탕과 근본이 완전히 열려서 다 드러나는 대도이다. 진리의 진면목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 속에서 신비의 베일에 싸여 있었던 하느님의 진면목까지 모두 드러나게 되는 궁극의 대도이다.
수운선생께서 『몽중노소문답가』에서 “너는 또한 年淺해서 억조창생 많은 백성 태평가 격양가를 불구에 볼 것이니 이 세상 무극대도 전지무궁 아닐런가”라고 한 것은 후천 5만년의 무극대운 속에서 펼쳐지는 태평성대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화세상 사람들아 무극지운 닥친 줄을 너희 어찌 알까보냐”하시어 천지대운인 무극지운이 온 것을 알기가 쉽지 않지만 모든 인류는 무극대운이 우리 눈앞에 다가왔으니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일깨워 주셨다.
5. 괴질의 엄습과 후천개벽을 예고
후천세상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괴질이 엄습하여 인류의 생사를 판단하게 되는데 수운선생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안심가, 몽중노소문답가)
그 말 저 말 다 던지고 한울님만 공경하면 아 동방 삼년괴질 죽을 염려 있을소냐(권학가)
수운은 무극세상이 오기 전에 후천개벽이 있고 이때 괴질이 창궐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괴질은 어느 나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전 지구에 모두 엄습할 것이라고 하였으며 3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한 12제국이라는 것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나라를 의미한다. 수운이 살던 그 시대는 제국주의 시대였다. 그리고 12는 십이지지로서 10干이 하늘의 질서를 나타내고 12支는 땅의 질서를 나타냄으로 12제국이라는 말로 지상에 있는 모든 나라를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후천개벽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수운은 평소에 항상 도인들에게 말하기를 “개벽 이후로 세상에 혹 상제를 친히 모시고 문답하고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있었느냐”16)고 하셨다.
*16) 윤석산 역주, 도원기서 p53.
여기서의 개벽은 선천개벽을 말한다. 개벽은 선천개벽과 후천개벽이 있다. 선천개벽은 우주1년 사계절에서 겨울이 끝나고 봄 시간대가 열리는 만물탄생 개벽을 말하고 후천개벽은 선천의 여름시대가 끝나고 후천의 가을시대가 열리는 만물성숙의 개벽을 말한다. 129,600년을 둘로 나누어 64,800년을 선천이라 하고 64,800년을 후천이라 하는 것은 자연의 선후천을 말하는 것이고 선천 5만년과 후천 5만년은 인간이 지상에 살면서 건설하는 문명의 선후천을 말한다.
『용담유사』에는 선천 5만년과 후천 5만년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나오고 있다. 「용담가」에 “한울님 하신 말씀 개벽 후 오만년에 네가 또한 첨이로다. 나도 또한 개벽 이후 노이무공勞而無功하다가서 너를 만나 성공하니 나도 성공 너도 得意 너희 집안 운수로다”는 선천 봄 개벽 이후 후천 가을개벽이 열리려고 하는 이때까지가 5만년이었다는 말씀이다.
「용담가」의 “무극대도 닦아내니 오만년지 운수로다”와 「검결」의 “萬世一之 丈夫로서 五萬年之 時乎로다” 그리고 『도원기서』의 “천운이 순환하여 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로써 오만년 무극의 도를 나에게 명하여 내린 것이다”17)는 후천개벽으로 가을세상이 열린 이후 폐장되는 겨울이 올 때까지가 또한 5만년이라는 것이다. 수운은 지금의 이 시대가 선천 5만년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후천 5만년의 무극대운이 열리려고 하는 후천개벽의 대전환기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후천개벽은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대변혁으로 신천신지가 열리는 천지개벽, 인간의 문명이 총체적으로 변혁되는 문명개벽, 그리고 인간의 정신과 육신이 환골탈태하는 인간개벽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동학의 연구자들은 후천개벽의 의미를 축소시키거나 왜곡시키고 있다.
*17) 윤석산 역주, 도원기서 p53.
후천개벽은 천지개벽이 아니라 인간중심의 문화개벽을 뜻하는 것으로 인류역사문화 전반의 일대 변혁과 새로운 창조의 교체를 뜻하는 말이다. 이와 같은 후천개벽의 역사관은 역사의 순환에 따른 천운의 회복을 의미한다.18)
본래 개벽은 천개지벽의 준말로 천지가 새롭게 열리는 것이며 후천개벽은 무극대운이 새롭게 열리는 것이다. 무극제인 상제님께서 지상에 강세하시어 하늘과 땅과 인간과 신명을 총체적으로 개벽하고 구원하시어 천지창조의 이상향을 지구촌에 건설하시는 것이다.
*18) 홍창화, 천도교 교리와 사상, 천도교중앙총부, 1991. p58~59.
Ⅲ. 보천교주 차경석과 보천교
1. 차경석의 동학인연과 증산상제님과의 만남
1) 차경석의 동학인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동학은 본래 상제님의 천명을 받은 최수운 대신사께서 창도하셨다. 대신사께서 순도殉道하시고 30년이 지난 1894년 갑오년 이 땅에 동학혁명이 발발하였다. 『증산도 도전』에서는 “선후천의 개벽이 본래 천도혁명이고 동학혁명은 이 혁명의 출발점”이라고 규정하였다.19)
*19) 증산도 도전편찬위원회, 증산도 도전 p87.
60갑자를 30개씩 전후로 나누면 후반부의 시작이 甲午가 된다. 甲子年에 대신사께서 순도하시고 30년이 지난 뒤 甲午年에 동학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이 후천의 천도혁명을 상징하는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후천개벽을 알리는 이 난의 대세를 낱낱이 지켜보셨다. 차경석과 동학의 인연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시작한다. 동학혁명 당시 차경석의 아버지 차치구(1851~1894)는 전봉준이 혁명을 일으킬 때 정읍에서 수천의 농민군을 이끌고 참여한 농민군 두령이다. 전봉준이 우금치전투의 패배와 태인 전투를 끝으로 순창 피노리로 몸을 숨기자 차치구는 국사봉 토굴에 숨어 지내다 흥덕현 감 윤석진에게 체포되어 1894년 12월 29일 흥덕 관아에서 분살형焚殺形을 당했다고 한다.20)
차치구의 아들 차경석은 동학을 신앙하며 이용구가 만든 일진회에 참여하여 전북 총대總代를 지내기도 하였고 일진회 간부들의 독단과 왜곡된 노선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20) 박종렬 지음, 차천자의 꿈, 도서출판 장문산, 2002. p25~27.
2) 증산상제님과의 만남
1907년 5월 17일 상제님께서 김형렬의 집을 떠나시며 “이 길이 길행이라. 한사람을 만나려 함이니 장차 네게 알리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김제군 금산면 용암리 물방앗간에 머무르시면서 차경석을 기다리셨다.
그 무렵 차경석은 동학의 3대 교주 손병희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새로운 길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당시에 증산 상제님께서는 1904년 진보회의 강경江景집회와 1904년 11월 일진회 회원들이 전주지회 개설문제로 불화가 생겨 이를 강제진압하려는 관에 대항하여 소동을 일으킬 때 상제님께서 비와 눈을 크게 내려 방한설비 없이 노상에 모인 일진회 회원 수천 명을 해산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한 공사 내용(증산도 도전 3:112)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차경석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강경집회와 11월의 소요 때 차경석이 일진회 전북 임시총대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사람을 만나려고 한다’라는 말씀 속에서 중요 성도 등을 미리 정해 놓고 만나셨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상제님께서 차경석을 만날 때의 상황(증산도 도전 3:180:2~22)
용암리(龍岩里) 물방앗간에 머무르시다가 그 앞 주막에서 정읍 사람 차경석(車京石)을 만나시니 당년 28세로 구척장신에 용모가 준수한 젊은이라. 원래 경석은 동학 신도로서 일찍이 일진회 전북 총대(總代)를 지낸 일이 있더니 이 날은 재산 문제로 송사하러 정읍에서 전주로 가는 길이더라. 경석이 용암리 주막에서 점심을 먹고 떠나려 할 즈음 상제님께서 대삿갓에 풀대님 차림으로 김자현 등 두어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시거늘 경석이 상제님을 뵈니 의표(儀表)는 소탈한 가운데 씩씩한 기운을 띠시고 언어동지(言語動止)는 순진하고 꾸밈이 없으시며 안광(眼光)이 사람을 쏘는 듯하여 감히 똑바로 볼 수가 없더라. 사람을 대하여 정겹게 말씀을 나누시면 마치 봄바람이 온 들에 가득 찬 듯하고 일의 사리를 밝히심에는 대하(大河)가 물결치듯 풀어 놓으시고 말씀의 운치는 너그럽고 크시어 천둥이 구르는 듯하며 모든 행동하심이 호호탕탕하여 폭 잡을 수가 없는지라 경석이 절로 마음이 끌리고 상제님의 기품에 취해 말씀을 청하니 상제님께서 온화하게 대답하시고 술을 드시다가 닭국 한 그릇을 경석에게 권하시니라. 경석이 받으매 어디선가 벌 한 마리가 날아와 국에 빠지거늘 경석이 수저를 멈추고 혹 상서롭지 못한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니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벌은 규모 있는 벌레니라.” 하시니라. 경석이 여쭈기를 “무슨 업을 하십니까?” 하니 웃으며 말씀하시기를 “의원 노릇을 하노라.” 하시고 경석이 다시 “어느 곳에 머무르십니까?” 하고 여쭈니 말씀하시기를 “나는 동역객(東亦客) 서역객(西亦客) 천지무가객(天地無家客)이로다.” 하시니라. 대저 경석이 상제님의 거주지를 여쭌 것은 뒷날 찾아뵈려 한 것인데 이렇게 말씀하시니 다시 찾기가 어렵겠으므로 떠나지 않기로 결심하고 이왕에 상제님의 지식을 시험하고자 하여 다시 “어떻게 하면 인권(人權)을 많이 얻을 수 있습니까?” 하고 여쭈니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폐일언(蔽一言)하고 욕속부달(欲速不達)이니라.” 하시니라. 이에 경석이 아뢰기를 “자세한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제님께서 일러 말씀하시기를 “사람 기르기가 누에 기르기와 같아서 일찍 내이나 늦게 내이나 먹이만 도수에 맞게 하면 올릴 때에는 다 같이 오르게 되나니 이르고 늦음이 사람의 공력에 있느니라.” 하시니라.
상제님의 도문에는 동학을 신앙하던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다. 차경석 성도를 제외하고도 박공우, 문공신, 김경학, 신경수, 황응종 등이 모두 동학신도였다. 유교, 불교 등의 신앙인들이 상제님의 성도로 들어오지 않고 유독 동학신도들이 많이 상제님 도문에 들어 온 것은 동학 신앙의 근본이 侍天主에 있었기 때문이라 사료된다.
우리는 경석이 “어떻게 하면 인권을 많이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 속에서 그의 마음속에는 사람을 많이 모아서 무언가를 해보고자 하는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엿볼 수가 있다. 이어지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경석의 이번 전주 길은 세무관과 송사할 일이 있어 서류를 가지고 가는 길이더니 경석이 서류를 내어 보이며 여쭈기를 “‘세 사람이 모이면 관장(官長)의 공사를 처결한다.’ 하오니 청컨대 이 일이 어떻게 될지 판단하여 주십시오.” 하거늘 상제님께서 그 서류를 소리내어 읽으신 뒤에 말씀하시기를 “이 송사는 그대에게 유리하리라. 그러나 이 송사로 인하여 피고(被告)의 열한 식구는 살길을 잃게 되리니 일의 곡직(曲直)을 불문하고 대인으로서는 차마 할 일이 아니니라. 남아가 반드시 활인지기(活人之氣)를 띨 것이요, 살기(殺氣)를 띰은 옳지 못하니라.” 하시니라. 이에 경석이 크게 감복하여 말하기를 “선생님의 말씀이 지당하오니 이 길을 작파하겠습니다.” 하고 즉시 그 서류를 불사르니라. 이 때 경석은 동학 신도로서 손병희를 따르다가 그 처사에 불만을 품고 다시 길을 바꾸려던 참이라. 이 날 상제님을 뵙고 모든 거동이 범속과 다름을 이상히 여겨 떠나지 않고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상제님의 뒤를 따라가니 곧 용암리 물방앗간이라. 경석이 상제님의 말씀을 들을수록 마음이 끌리어 그 자리에서 상제님을 모시겠다고 간청하되 상제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3:181)
송사는 경석의 바로 아래 동생 윤경의 아내 주판례가 시집올 때 윤경의 장인 주종호가 논을 떼어 사위에게 준 것으로 이것이 시비가 되어 송사가 빚어진 것이라 한다. 경석이 상제님의 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서 서류를 불사르고 송사를 작파한 것을 보더라도 경석도 대인의 심법이 있었고 기국이 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다음 구절로 이어진다.
상제님께서 숙소를 김치경(金致京)의 용암리 물방앗간에 정하시니 음식이며 잠자리며 모든 것이 누추하기 이를 데 없어 여느 사람도 견디기 어려워하는데 경석이 이러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떠나지 아니하고 상제님을 ‘정읍의 자기 집으로 모시겠다.’ 하거늘 상제님께서 진노하시어 큰 소리로 꾸짖으시기를 “나는 너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노라. 어서 내 앞에서 썩 물러가라, 이놈아!” 하시니라. 상제님께서 경석이 떠나지 않음을 괴로워하시며 수차 물러가기를 재촉하시되 경석이 듣지 않고 계속 자기 집으로 함께 가시기를 간청하니 그 때마다 혹 성을 내시고 욕을 하시며 쫓아내기도 하시는데 경석이 보기에는 그러한 모든 일이 더욱 범상치 않을 뿐 아니라 수운가사(水雲歌詞)에 있는 ‘여광여취(如狂如醉) 저 양반을 간 곳마다 따라가서 지질한 그 고생을 뉘로 대해 그 말하며’ 하는 구절이 생각나매 떠나지 않고 열흘 동안을 머물면서 제자가 되기를 굳이 청하니라. 이에 상제님께서 이르시기를 “네가 나를 따르려면 모든 일을 전폐하고 오직 내가 가르치는 바에만 일심(一心)하여야 할지니 이제 돌아가서 모든 일을 정리하고 6월 초하룻날 다시 이곳으로 찾아오라.” 하시니라. 경석이 비로소 하직하고 집에 돌아와 아우들을 모아 놓고 상제님을 만난 일과 전주 송사를 작파한 일을 말하며 “너희들, 사람 생명이 크냐, 돈이 크냐? 나는 사람을 죽일 수가 없어 그냥 돌아왔노라. 이제 나는 선생님을 따라 사람 살리는 공부를 하려 하노라.” 하고 아우들을 설득하더니 드디어 모든 일을 정리하고 6월 초하룻날에 다시 용암리에 와서 상제님을 뵙고 정읍으로 가시기를 간청하니라. 이 날 밤에 상제님께서 풀밭에서 주무시다가 닭이 운 뒤에 일어나시어 말씀하시기를 “잘못 풀밭에 누웠구나. 왜 일찍 깨우지 않았느냐.” 하시니라. 상제님께서 돌 위에서 주무시기도 하고 들판의 농부들과 한가로이 말씀을 나누기도 하시니 경석이 뒤따르며 지성으로 모시니라. 상제님께서 계속 경석의 추종을 불허하시다가 사흘 동안을 지내신 뒤에야 비로소 허락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일찍이 목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고생하다가 겨우 헤어나 발목물에 서 있는데 네가 다시 나를 깊은 길물로 끌어들이는구나.”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3:182)
용암리 물방앗간은 금산면 쌍룡리로 지금은 논으로 변했다고 한다. 차경석은 5월 17일부터 27일까지 열흘간 믿음을 시험하는 기간을 무사히 통과한다. 이후 상제님께서는 “네가 나를 따르려면 모든 일을 전폐하고 오직 내가 가르치는 바에만 일심하여야 한다.”하시어 그에게 커다란 임무를 내리시려고 준비를 시켰고 6월 1일 다시 찾아오라고 말씀하셨다. 6월 1일은 차경석의 생일날이다. 생일은 모든 사람이 태어난 날이다. 이날 다시 찾아오라고 하신 것은 그를 당신의 일꾼으로 거듭 태어나게 한다는 숨은 뜻이 들어있다.
6월 1일 용암리 물방앗간으로 다시 경석이 찾아온다. 상제님께서는 3일을 더 머무르신 후 6월 4일 경석의 집으로 출발을 하신다. 『보천교 교전』에는 6월 3일날 출발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출발하는 날 원평에 이르시어 ‘군중을 향하여 말씀하셨다.’는 내용을 보면 원평장이 가을의 성숙을 상징하는 4·9장이 섬으로 4일이 옳은 것으로 판단된다. 상제님께서는 일진회가 일어난 1904년부터 삿갓을 쓰시다가 이날부터 의관을 갖추셨는데 이를 보더라도 앞으로 그가 맡을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살펴 알 수 있다. 이날 저녁 차경석은 상제님을 정읍 솔안 최씨 재실에 있는 친구 박공우의 집으로 모시고 간다. 이때 상제님께서 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이제 만날 사람 만났으니 통정신通情神이 나오니라(도전 3:184:7)고 하셨다. 그리고 다음으로 당신의 신원을 밝혀 ”동학주문에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 하였으니 나의 일을 이름이라(도전 3:184:9)고 말씀하셨다. 통정신은 뜻과 마음을 통하게 하는 신이다. 상제님께서 차경석 박공우 두 사람을 만난 뒤에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이 두 사람의 기국이 상제님과 심법이 통할 수 있을 정도로 크기 때문에 비로소 당신이 누구인지 신원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제님께서는 “천하의 통정신은 정읍으로 운이 돌아온다(도전 4:109:2)”고 하셨다.
상제님께서 1907년 6월 이후 차경석의 집에 자주 머무시면서 수부공사, 포정소 공사, 남조선배 공사, 무신납월 공사 등의 대공사를 처결하셨다.
2. 차경석에게 내린 사명과 포교활동
증산 상제님의 천지대업은 선천개벽이 시작되면서부터 예정이 된 일이고 환국·배달국 시대부터 준비된 일이며 선천종교가 나오면서 더욱 구체화 되었고 실질적인 시작은 최수운 대신사와의 천상문답사건부터 비롯하여 현실화되었다. 그러나 “수운이 능히 유교의 테 밖에 벗어나 진법을 들춰내어 신도와 인문의 푯대를 지으며 대도의 참빛을 열지 못하므로(도전 2:30:15) 1871년 상제님께서 이 땅에 오시게 되었던 것이다. 증산 상제님은 1901년부터 1909년까지 9년 동안 모사재천謀事在天의 천지공사를 집행하시고 1909년 6월 24일 천상의 보좌로 환궁하셨다. 이후의 역사는 성사재인成事在人의 과정이다. 천지공사는 크게 세운공사와 도운공사로 나누어지는데 도운공사는 증산 상제님의 도가 인간 역사에 뿌리내려 도성덕립하는 개척과정에 관한 공사이다.21) 생장성으로 삼변성도三變成道하는 우주원리에 의해 도운의 과정도 제1변, 제2변, 제3변의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차경석의 최대의 공덕은 상제님 전에 태모 고수부님을 천거한 것이다. 1911년 상제님의 성령을 받아 도통을 하신 태모님께서는 도운이 낙종落種과 이종移種과 추수秋收의 3변과정을 통해 매듭지어질 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다. *21) 안경전 증산도의 진리, p604.
이 때 수부님께서 일어나 앉으시어 갑자기 상제님의 음성으로 경석에게 “누구냐?” 하고 물으시니 경석이 놀라며 “경석입니다.” 하거늘 또 “무슨 생이냐?” 하고 물으시니 경석이 “경진생(庚辰生)입니다.” 하고 대답하니라. 이에 말씀하시기를 “나도 경진생이라. 속담에 동갑 장사 이(利) 남는다 하나니 우리 두 사람이 동갑 장사 하자.” 하시고 다시 생일을 물으시니 경석이 “유월 초하루입니다.” 하고 대답하거늘 말씀하시기를 “내 생일은 삼월 스무엿새라. 나는 낙종(落種) 물을 맡으리니 그대는 이종(移種) 물을 맡으라. 추수(秋收)할 사람은 다시 있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11:19:6~10)
위의 내용은 도운의 전개과정을 벼농사를 짓는데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태모님의 생일이 들어있는 3월은 볍씨를 뿌려 못자리를 만드는 때니 낙종을 하는 때이고 차경석의 생일이 있는 6월은 모내기를 하는 때로서 이종을 하는 때이다. 여기서 차경석의 사명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는 증산도의 1변 도운에서 이종 운을 맡아 증산도의 대 부흥시대를 여는 사명을 맡고 있는 것이다.
차경석이 기국이 크고 많은 사람을 거느릴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상제님께서 “경석은 대재大才요 만인지장萬人之長이 될 만하다. 너에게 일극一極을 주노라(도전 3:291:3)”하신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욕심도 대단했는데 상제님께서 소원을 묻자 “열지裂地를 원한다(도전 6:85:2)”고 하여 한나라의 왕이 되고자 하는 뜻을 피력하였다. 이에 대해 『증산도 도전』에서는 “차경석 성도는 천하를 쥐고 통솔할 만한 기국과 뱃심이 있었다. 상제님께서는 그 영웅적인 기질을 도운 개척의 역사에 쓰시어 난법 도수의 시간대에 인사 대권을 맡는 사역자로 내세우셨다.”라고 해석하였다. 또 한 번은 “십오十五 주시기를 원하옵니다(도전 5:257:2)”라고 아뢰자 “도적놈이로다.”하고 꾸짖으시며 허락하지 않으신 내용도 있다.
차경석의 기국과 배짱이 컸던 것은 후천음양도수를 보실 때 아내를 12명을 원했고 상제님께서 이유를 묻자 “십이제국에 한 명씩 두고 달마다 한 나라씩 순회하면 남아 행락行樂의 극치일까 하옵니다(도전 5:204:7)”라는 말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이러한 영웅의 심법에 걸맞게 상제님께서는 그에게 동학역신해원공사의 두령으로 임명하였다. 다음은 이에 관한 공사를 보신 내용이다.
공신이 여러 성도들을 돌려보낸 뒤에 상제님께서 공신, 경수, 응종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경석이 성경신(誠敬信)이 지극하므로 달리 써 볼까 하였으나 제가 스스로 청하니 어찌할 수 없는 일이로다. 지난 갑오년에 동학 신도들이 여러 만 명 학살되어 모두 지극히 원통한 원귀(寃鬼)가 되어 우주간에 나붓거리는지라 원래 동학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창하였으나 때가 때인 만큼 안으로는 불량하고 겉으로만 꾸며대는 일이 되고 말았나니 다만 후천 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못함이라. 마음으로 각기 왕후장상(王侯將相)을 바라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릇 죽은 자가 수만 명이니 그 신명들을 해원시켜 주지 않으면 후천에 역도(逆度)에 걸려 반역과 화란이 자주 일어나 정사(政事)를 못 하게 되리라. 그러므로 이제 그 신명들을 해원시키려고 원혼을 통솔할 자를 정하려는 중인데 경석이 십이제국을 말하니 이는 스스로 청함이라. 이제 경석에게 동학 역신 해원의 삼태육경(三台六卿) 도수를 붙이리라.” 하시고 “그 부친이 동학 접주로 그릇 죽었고 경석도 또한 동학 총대(總代)였으니 오늘부터는 동학 때 한 맺힌 신명들을 전부 경석에게 붙여 보내어 이 자리에서 왕후장상의 해원이 되게 하리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춘치자명(春雉自鳴)의 설화(說話)를 들어 보라. 배짱이 그만하면 능히 그 책임을 감당하리니 뒷날 두고 보라. 경석이 금전도 무수히 소비할 것이요, 사람을 모으는 것도 갑오년보다 훨씬 많게 될 것이니라. 경석에게 밥주걱을 맡겼나니 경석은 제왕(帝王)만큼 먹고 지내리라. 이렇게 풀어놓아야 후천에 아무 일도 없으리라.” 하시고 두루마리에 글을 써서 대공사를 처결하시며 외인의 출입을 금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5:205)
위의 내용 속에서 차경석은 기국은 컸으나 욕심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동학신도들이 “안으로는 불량하고 겉으로만 꾸며대는 일이 되고 말았다.”고 하셨는데 인격적·도덕적·능력적·심법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고 구호만 요란하게 외쳤다는 것도 엿볼 수 있다.
『증산도 도전』에서는 왜 상제님께서 동학 신명을 차경석에게 붙여 해원케 하셨는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22) 증산도 도전 p646~647.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을 노래하며 후천개벽을 학수고대한 동학혁명의 종군자들이 바로 상제님의 무극대운을 부르짖은 일꾼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상제님께서 몸소 그들의 원한을 초기 증산도 도운 개척의 운로에 붙여 해소시키셨다.
다음의 공사는 차경석에게 농바우 장군 도수를 붙이는 공사이다.
경석을 데리고 순창 농바우 박장근의 집에 이르러 말씀하시기를 “이제 천하대세를 회문산 오선위기형(五仙圍碁形)의 형세에 붙여 돌리나니 네게 한 기운을 붙이노라.” 하시니라. 이어 장근에게 이르시기를 “너의 머슴을 불러 어젯밤 무엇을 본 일이 있는지 물어 보라.” 하시거늘 장근이 머슴을 불러 물으니 머슴이 대답하기를 “어젯밤 꿈에 한 백발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농바우를 열고 큰칼과 투구와 갑옷을 꺼내는데 장검은 서릿발이 돋은 듯하고 갑옷과 투구는 빛이 나서 눈이 부셨습니다. 신선이 칼과 투구와 갑옷을 저에게 주면서 ‘한 장군이 명(命)을 받들고 여기에 올 것이니 이것을 그 장군에게 주라.’ 하므로 제가 그것을 받아서 두었사온데 그 자리가 바로 저 자리입니다.” 하며 경석이 앉은 쪽을 가리키는지라 상제님께서 들으시고 “네가 꿈을 옳게 꾸었도다. 농바우의 전설이 허망한 말이 아니로다.” 하시고 다시 장근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공사의 증인이니라.” 하시니라. 대저 그 지방에는 농바우 속에 갑옷과 투구와 긴 칼이 들어 있는데 ‘장군이 나면 내어가리라.’는 말이 전하여 오니라.
(증산도 道典 3:207:5~14)
또 차경석을 장군에 임명하는 다음과 같은 공사도 있다.
12월 20일에 성도들에게 24절후를 읽히신 후 밤중에 경석의 집 앞 버드나무 밑에 벌여 세우시고 북쪽을 향하여 휘파람을 부시니 난데없이 방장산(方丈山)으로부터 한 줄기 실구름이 일어나서 사방을 둘러 문턱 모양을 이루거늘 상제님께서 큰 소리로 외쳐 말씀하시기를 “곤이내(閫以內)는 짐(朕)이 제지(制之)하리니 곤이외(閫以外)는 장군이 제지하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6:92)
곤이외(閫以外)는 장군이 제지하라는 말은 삼국시대 오나라의 손권이 백면서생 육손을 대장군으로 임명할 때 그의 손을 들고 외친 말이다. 이는 증산 상제님께서 영웅의 정신을 가진 차경석을 내세워 난법도운의 개척시대를 열도록 명하신 공사이다.23) 증산도 도전 p842.
이어서 이러한 도수를 부여받은 차경석의 포교활동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916년 차경석은 태모님으로부터 통교권을 빼앗고 24방주 체제를 조직하였다. 이때가 낙종落種에서 이종移種으로 전환하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차경석은 상제님께서 그의 집벽에 “千古春秋阿房宮이요 萬方日月銅雀臺라
천고춘추아방궁 만방일월동작대(도전 3:187:2)“고 써 붙인 것과 “곤이내閫以內는 짐朕이 제지制之하리니 곤이외閫以外는 장군이 제지하라!(도전 6:92:3)”와 1909년 정월 초삼일 새벽에 상제님을 대행하여 고사치성제告祀致誠祭를 올린 것을 종통의 근거로 삼았다. 특히 마지막 고사치성을 중시하여 보천교에서는 1909년을 포교 원년으로 정하였고 기유년 1월 3일을 교통수수일敎統授受日, 창교기념일創敎記念日로 정하여 치성을 올렸다. 다음해 1917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외유를 떠나 포교에 진력하였고 1919년에는 24방주제도를 확대하여 60방주제를 조직하였다. 상제님께서 공사보신 동학역신해원도수와 방주제라는 비밀조직 그리고 식민지 백성으로서 의지할 곳이 없었던 백성들의 희망이 되어 1920년에는 신도가 무려 600만에 달하고 간부의 숫자만 55만7천7백명이 되었다고 한다.24) 안경전 증산도의 진리, p651~652.
상제님께서는 경석에게 동학 역신 해원의 삼태육경三台六卿 도수를 붙여 그를 통해 왕후장상의해원이 되게 한다고 말씀하셨다. 상제님의 말씀처럼 차경석은 1921년 9월 24일 황석산 고천제에서 교명을 보화교普化敎라 하고 국호를 시국時國이라고 선포하였다. 그런데 후세에 보천교라고 알려진 것은 5개월 뒤인 1922년 2월에 경성의 포교 책임자 이상호는 보화교로는 경찰의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고 여겨 보화교의 普 자와 당시 공인된 천도교나 천주교의 天 자를 따서 보천교로 조선총독부에 등록하였다는 것이다.25)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상생출판, 2017, p42.
차경석의 보천교는 국가조직의 형태를 강하게 띄고 있다. 신유(1921)년 정월에는 교단을 재조직해 전국 각 도에 정리正理와 부정리副正理를 각 1명씩 두고 360군에는 포장布長과 부포장副布長을 각 1명씩 배속하였다고 한다.26) 안경전, 증산도의 진리, p652.
삼태육경이란 삼정승과 육조판서를 상징하며 각도와 군의 책임자들은 개벽을 하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면 자신들이 새로운 국가에 실지로 그 직책을 맡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인간과 신명은 신인합일의 관계로 일체를 이룬다. 동학혁명 때 왕후장상을 꿈꾸다 참혹하게 죽은 60여만 명에 이르는 동학 농민군들의 신명이 보천교의 간부들에게 붙어 해원을 한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차경석이 600만 신도의 두령이 될 수 있도록 위에서 언급한 도수 이외에도 많은 공사를 통해 물샐 틈 없이 도수를 붙여 놓으셨다. 이에 대해서 몇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가 포정소布政所 도수이다. “이는 포정공사布政公事라. 정읍에 포정소를 정하노라 하시며 장차 크게 흥하리라.(도전 6:78:4~5)”하셨다.
이에 대해 『증산도 도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27) 증산도 도전, p837.
포정소는 상제님 진리를 펴는 도정道政의 본부가 자리 잡는 곳으로 제1변 파종 도수는 정읍 대흥리大興里, 제3변 도운의 추수 도수는 미래의 수도인 태전太田에 붙이셨다. 제1변과 제3변 도운의 중심지는 모두 태극의 시종始終 도수에 의해 大 자로 시작하는 곳이다.
둘째, 왕자 포덕도수이다. 상제님께서 “왕자王者 포덕도수布德度數를 정읍에 둔다 하시더니 뒷날 경석이 교도 수백만을 두니라(도전 3:291:4)”라 하셨다. 이는 경석이 일세의 왕처럼 등극을 하고 수많은 교도를 거느리게 된다는 뜻이다.
셋째, 천맥도수이다. 이에 대해 상제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공사를 보셨다.
정읍 대흥리에 계실 때 하루는 성도들에게 “정읍에 천맥阡陌 도수를 붙인다.”하시고 공사를 행하신 후에 말씀하시기를 “여기가 못자리니 이것이 천하파종天下播種 공사니라.”하시니라.(도전 6편48장)
*천맥阡陌 도수- 논밭사이에 가로 세로로 난 길. 남북으로 난 것을 천阡, 동서로 난 것을 맥陌이라 한다. 곧 상제님 진리가 거미줄처럼 전후좌우 막힘없이 사방으로 길을 내고 서로 연결하여 지구촌을 석권하는 규모 있는 포교도수이자 대규모의 인사조직을 뜻한다. -증산도 도전 p821~822-
이 도수는 차경석의 성인 車와 그가 터전을 정한 정읍井邑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도수라고 생각된다. 장기판에서 車는 전후좌우로 막힘없이 행마를 하니 세상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어 포교를 하는 도수와 연결된다. 井邑의 井은 대단히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중 몇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보천교의 교기敎旗가 井 字로 되어 있다. 보천교에서 교기를 처음 만든 때는 이상호가 경성 동대문 밖 창신동에서 보천교 진정원眞正院이라는 간판을 걸고 포교활동을 시작할 때인 1922년 2월 이후로 추정된다.29)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p42.
井의 의미에 대해 『보천교 교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30)보천교 중앙총부, 보천교 교전, 보천교 중앙총부 발행, 포교 73년 p412~413.
*보천교 교기-황색바탕에 적색으로 물들여 정자가 나오게 했다.
이를 통해 보면 보천교기는 井邑의 井字를 나타낸 것이고 수원水源이 되어 백성들을 이롭게 기르는 것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주역의 48번째 괘인 수풍정괘水風井卦와도 상통하는 의미이다.
둘째, 井의 형상이 상하좌우로 소통되어 있듯이 정읍을 四海 끝까지 포교가 거미줄처럼 얽혀 뻗어나가는 것을 상징한다. 井의 가운데 口가 태극을 상징하고 중심을 상징한다.
셋째, 井은 원십자[十]의 형상으로 추상하여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게 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주 주재자의 마음, 상제님의 무극대도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위의 내용을 요약하면 증산 상제님의 무극대도가 정읍 大興里에서 발원하여 크게 흥하여 방방곡곡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감을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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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60방주 조직
이어서 보천교 도세성장의 핵심인 60방주제와 그 조직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차경석은 1919년 9월 그믐날 함양군 地谷面 德庵里 徐萬植의 집에 이르러 덕암리 뒤 대황산大篁山 기슭에 단소壇所를 정하고 3층으로 단을 쌓고 60방주를 3회로 三分하여 10월 초순 참배케 하였다. 보천교에서는 60방주제方主制를 도체道體라 하고 다음의 그림으로 표시하고 있다.31)보천교 중앙총부 보천교 교전 p380. 이어서 도체도道體圖를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32)보천교 중앙총부 보천교 교전 p381.
수화금목은 교정敎正이라 칭하고 동서남북 춘하추동은 교령敎領이라 칭하고 이십사방은 포주胞主라 칭하고 이십사절후는 운주運主라 칭한다.
이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60방주 |
4교정 |
사행 |
수화금목 |
8교령 |
사방 |
동서남북 | |
사계 |
춘하추동 | ||
24포주 |
24방위 |
乾, 亥, 壬, 子, 癸, 丑, 艮, 寅, 甲, 卯, 乙, 辰 巽, 巳, 丙, 午, 丁, 未, 坤, 申, 庚, 酉, 辛, 戌 | |
24운주 |
24절후 |
동지, 소한, 대한, 입춘,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 입하, 소만, 망종, 하지, 소서, 대서, 입추, 처서, 백로, 추분, 한로, 상강, 입동, 소설, 대설, |
표2. 60방주 구성도
보천교의 중앙에서 쓰는 인장印章을 戊己日月土로 刻하였다. 그 뜻은 戊己는 24방위의 중앙이고 日月은 24절기의 기강紀綱이고 土는 오행의 중앙이므로 곧 60방주의 중앙이라는 의미를 취하였다33)고 했는데 이는 교주 차경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도체도 원의 아래에 방주하임方主下任이라 하고 경례敬禮, 교무敎務, 절의節義, 집리執理, 찰이察異, 행신行信이라 하였는데 이는 60방주 아래 둔 6任의 명칭이다.
또 6任아래 12任을 정하여 일일흥사一日興思 이일소청二日掃淸 삼일수정三日需淨 사일근업四日勤業 오일과서五日寡舒 육일관서六日寬恕 칠일추호七日推護 팔일징위八日懲危 구일계단九日稽斷 십일순행十日詢行 십일일반환十一日叛還 십이일훼복十二日毁復이라 하였다.34)
12任 아래에는 다시 8任을 두고 8任 아래에 15任을 두었다. 도체도의 24절기 외원外圓에 15日, 180時, 1,440刻, 21,600分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을 분석하면 60방주제가 1년을 기준으로 시간, 시각, 분으로 세분해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0時는 15×12=180으로 15일의 시간이고 1,440刻은 180×8=1,440으로 15일의 刻數이고 21,600분은 1,440×15=21,600으로 15일의 分이다.
60방주 아래 6임을 두어 360명을 구성한 것은 1년이 360일로 이루어진 것을 상징하는데 60갑자가 6회 순환하여 1년을 이루는 것과 같다. 6임 아래에 12임을 둔 것은 하루가 12시간(동양에서 12지지를 가지고 하루를 표시한 시간이다)으로 이루어진 것을 상징하며 360명×12=4,320명으로 구성된다.
12임 아래 8임을 둔 것은 1시간이 8刻으로 이루어진 것을 상징하며 4,320명×8=34,560명으로 구성된다. 8임 아래 15임을 둔 것은 1각이 15분으로 이루어진 것을 상징하며 34,560명×15=518,400명으로 구성된다.
60+360+4,320+34,560+518,400의 숫자를 모두 더하면 55만 7천 7백명의 간부 숫자가 나온다.
이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조직 |
구성 |
상징 |
인원 |
60방주 |
교정,교령,포주,운주 |
60갑자 |
60명 |
60방주 아래 6임 |
60×6 |
360일 |
360명 |
6임 아래 12임 |
360×12 |
1일이 12시로 구성 |
4,320명 |
12임 아래 8임 |
4,320×8 |
1시간이 8각으로 구성 |
34,560명 |
8임 아래 15임 |
34,560×15 |
1각이 15분으로 구성 |
518,400명 |
총계 |
|
557,700명 |
표3. 60방주 산하 조직표
*33), 34) 보천교 중앙총부, 보천교 교전 p383
4. 보천교의 몰락과 차경석의 죽음
동학의 역신 해원도수가 서서히 끝나가면서 상제님께서 짜놓으신 공사 그대로 보천교는 1924년 갑자년부터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현실적인 이유로는 일제의 강력한 탄압과 집요한 음해 공작, 내부의 분란, 상제님에 대한 믿음의 와해, 그리고 무리한 건축공사 등을 꼽을 수 있다. 본고에서는 『증산도 도전』에 있는 상제님의 말씀을 통해 관련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상제님께서는 1907년 10월 순창 농바위에 가서 장군도수를 붙이시고 돌아오시는 길에 경석에게 다음의 글 한 수를 읽어 주셨다.
경지영지불의쇠經之營之不意衰하니 대곡사로결대병大斛事老結大病이라
천지권우경지사天地眷佑境至死하니 만사아손여복장漫使兒孫餘福葬이라
천하사를 평생 경영하다 뜻밖에 쇠패하니
배포가 아무리 커도 일이 쇠해져 큰 병을 얻으리라.
천지가 도와주어도 마침내 죽음에 이르니
헛되이 자손을 부려 남은 복마저 장사지내는구나.
(증산도 道典 3:208:10)
위의 글은 보통 차경석의 만장으로도 해석한다고 한다. 위의 4句의 끝 글자가 쇠衰·병病·사死·장葬으로 되어 있다. 불의쇠不意衰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쇠퇴하게 되고 아무리 기국이 커도 600만에 달하던 신도들이 떠나가고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가슴속에 큰 병이 들고 결국 죽음에 이르러 장사를 지낸다는 의미이다.
1907년 10월에 상제님께서 차경석의 시종始終공사를 선후로 보신 것이다.
차경석은 1925년부터 십일전十一殿을 짓기 시작하여 1929년 2만여 평 부지에 십일전과 45채에 이르는 부속건물을 준공했다.
상제님께서 1907년 6월 쯤 경석의 집 벽에 “천고춘추아방궁千古春秋阿房宮이요 만방일월동작대萬方日月銅雀臺라”고 써 붙이시며 경석으로 하여금 마음에 간직하여 잊지 않게 하시고 또 다음과 같이 경계하여 말씀하셨다. “경석아, 집을 크게 짓지는 말아라. 그러면 네가 죽게 되느니라.” 하시니라. 하루는 상제님께서 형렬에게 말씀하시기를 “정읍이 대창(大昌)하되 잠농지운(蠶農之運)이라. 누에는 집만 지으면 죽나니 집만 끝이 나면 죽으리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3:187:2~5)
위의 말씀은 차경석의 운명을 암시해 주고 있는 내용이다. 진시황이 아방궁을 지었지만 영화를 누리지 못하고 죽었고 조조가 역시 동작대를 지었지만 역시 왕이 되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십일전 건물의 준공과 더불어 보천교는 빠른 속도로 와해되기 시작했다.
1928년 1월 3일 차경석은 무진설법戊辰說法을 통해 신앙대상을 선친인 차치구로 변경하고 교리를 유교식 교리로 변경하였으며 주송呪頌 수련을 금지하고 정좌수행법正坐修行法으로 변경하여 신로信路를 변경하였다. 이에 대해 상제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공사를 보신 적이 있다.
하루는 상제님께서 한참 바쁘게 공사를 보시다가 느닷없이 “경석아! 네가 나를 꼭 믿겠느냐?”하시니 경석이 “예! 꼭 믿겠습니다.” 하고 대답하거늘 이와 같이 세 번을 다짐받으신 후에 다시 물으시기를 “그렇다면 내가 두겁을 써도 믿겠느냐?” 하시니 “예! 그대로 믿겠습니다.”하고 대답하니라.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집안은 전주이씨 때문에 망하게 되리라.” (도전 6:90:1~3)
전주이씨는 차경석의 부인이다. 두겁이라는 것은 가늘고 긴 물건의 끝에 씌우는 물건으로 상제님께서 전주이씨의 꿈에 거짓된 내용을 보여주고 이를 곧이 곧대로 믿는 차경석의 미래를 훤히 꿰뚫어보시고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증산도 도전』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35) -증산도 도전 p841~842.-
차경석 성도가 道紀58년(戊辰 1928)에 이르러 아내 이씨로부터, ‘영안을 통하여 보니 상제님의 자리에 삼황오제신이 들어서고 상제님께서 풀대님에 삿갓을 쓰고 보좌를 떠나시더라.’는 말과 ‘삼황오제신은 곧 경석의 아버지 차치구’라는 말을 듣고 혹하여 차치구를 신앙 대상으로 받들고 교리도 유교식으로 바꾸었다.
상제님을 배신한 차경석의 꿈은 결코 이루어 질 수 없었다.
상제님께서는 차경석에게 “네가 무슨 천자냐 하시고 천자를 도모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도전 6:53:5)”하셨고 태모님께서도 “네가 천자라 하나 헛천자니라(도전 11:112:3)”고 꾸짖으셨으며 결국 용이 되지 못하고 이무기가 될 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대흥리에서 하루는 차경석, 안내성, 박공우를 데리고 앞내에 나가 목욕하실 때 경석에게 명하시어 소금 한 줌을 가져다 물 위에 뿌리게 하시고 물에 들어서시며 “고기잡이를 하리라.” 하시더니 느닷없이 경석의 다리를 잡고 “큰 이무기를 잡았다.” 하시거늘 경석이 아뢰기를 “제 다리입니다.” 하니 “그렇게 되었느냐?” 하시고 놓으시니라. 이후에 경석과 공우를 데리고 어디를 가실 때 경석을 돌아보며 말씀하시기를 “이무기가 용(龍)이 되려다가 되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면 30리 안이 쏘가 되나니 이 말을 잘 기억하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6:54)
또 상제님께서는 차경석이 배반할 것을 아시고 다음과 같이 경계하셨다.
천지대업의 배반자를 경계하심
대흥리 경석의 집에 계실 때 하루는 경석을 마당에 꿇어앉히시고 공우에게 망치를, 윤경에게 칼을 들리신 뒤에 대청마루에 올라 정좌하시더니 경석을 향해 큰 소리로 말씀하시기를 “네가 이후에도 지금 나를 모시고 있을 때와 같이 마음이 변하지 않겠느냐? 일후에 만일 마음이 변개함이 있으면 이 망치로 더수기를 칠 것이요, 이 칼로 배를 가르리라. 꼭 변함이 없겠느냐?” 하고 다짐을 받으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는 자는 창성하고, 나를 배반하는 자는 멸망하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6:55)
1936년 정월에 월곡 차경석의 종질 차순기가 칼을 들고 월곡의 거실에 들어가 죽이겠다고 날뛰어 월곡은 이를 피했으나 이후 신색神色이 나빠지고 뒷발에 종기가 나 큰 고통을 겪었다.36) 박종렬, 차천자의 꿈, p241.
상제님께서는 실패한 왕의 대표인물인 초패왕 도수를 차경석에게 붙이시는 다음과 같은 공사를 보셨다.
하루는 형렬과 경석을 데리고 순창 장군암(將軍岩)에 가시어 공사를 행하실 때 경석을 장군바위에 앉히시고 상제님께서는 형렬과 함께 바위 아래에 서시어 말씀하시기를 “오늘 너에게 초패왕(楚覇王) 도수를 붙이노라. 모든 일에 선으로써 행사하라.” 하시고 형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공사의 증인이니라.” 하시고 돌아오시니라. (증산도 道典 5:180)
항우는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초패왕이 되었으나 유방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자결로써 일생을 마감하였다.
차경석의 최후에 대해 『증산도 도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병자(丙子 : 道紀 66, 1936)년 윤3월 10일에 차경석이 가족들과 60방주를 비롯한 많은 신도들을 불러 모으고 말하기를 “내가 신도들에게 몹쓸 짓을 했다. 600만 교도들, 저 불쌍한 사람들, 내 사람들…. 내가 없어져야 한다.” 하더니 잇몸을 찔러 피를 내고 마약을 입에 넣은 뒤에 얼마 후 숨을 거두니 시각은 오후 두 시경이라. (증산도 道典 11:320:1~3)
일세의 풍운아 차경석은 초패왕처럼 결국 자살로써 생을 마감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보면 상제님의 천지공사 내용은 일점일획의 오차 없이 현실의 역사에 전개가 된다. 나라를 잃어버린 암울한 현실 속에서 차경석은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의 사명은 개척 도운의 이종도수를 맡아 조선의 방방곡곡에 상제님의 진리를 전파하여 제1변 도운의 부흥시대를 열어 추수운의 토대를 쌓는 것이었다. 제1변 도운이 없었다면 제3변 도운인 지금의 증산도도 존재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지난至難한 역사적 환경을 극복하고 600만 명의 신도를 거느리고 일제의 탄압 속에서 시국時國이란 나라를 선포했던 차경석은 그의 이름 클경, 돌석 그대로 도운의 주춧돌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상제님께서도 어천하시기 직전 “내가 천지 신명 공판에서 정읍 차경석을 잘 선정하여 실수가 없으니 내가 사람을 잘 알아서 썼다(도전 10:26:7).”고 말씀해 주셨다.
Ⅳ.동학과 보천교의 맥을 이은 증산도
1. 참동학 증산도
증산도는 1871년 이 땅에 강세한 증산 상제님께서 창도한 무극대도이다. 상제님께서는 1901년부터 1909년까지 선천의 역사를 매듭짓고 후천 5만년 인류가 살아갈 조화문명시대를 9년 천지공사로써 질정하시고 천상의 보좌로 어천하셨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최수운의 천상문답사건 당시의 상제가 당신임을 다음과 같이 밝혀주고 있다.
최수운(崔水雲)에게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대도를 세우게 하였더니 수운이 능히 유교의 테 밖에 벗어나 진법을 들춰내어 신도(神道)와 인문(人文)의 푯대를 지으며 대도의 참빛을 열지 못하므로 드디어 갑자(甲子 : 道紀前 7, 1864)년에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신미(辛未 : 道紀 1, 1871)년에 스스로 이 세상에 내려왔나니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수운가사(水雲歌詞)에서 말하는 ‘상제’는 곧 나를 이름이니라. (증산도 道典 2:30:14~17)
또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해주셨다.
하루는 여러 성도들을 앉혀 놓고 말씀하시기를 “최수운이 성경신이 지극하기에 내가 천강서(天降書)를 내려 대도를 열게 하였더니 수운이 능히 대도의 참빛을 열지 못하므로 그 기운을 거두고 신미년에 직접 강세하였노라.” (증산도 道典 4:9:1~2)
위의 내용을 통해볼 때 上帝·天主·한울님을 비인격신으로 보고 내 몸 안에 존재하는 것이라 하고 범신론적汎神論的으로 보는 것들은 모두 왜곡된 사론邪論이다. 상제님께서는 “동학주문에 시천주侍天主 조화정造化定이라 하였나니 나의 일을 이름이라(도전 3:184:9).”고 하시어 당신이 천주임을 직접 밝혀 주셨다.
증산상제님께서는 지금의 처한 현실과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과 당신의 신원을 다음과 같이 정확히 밝혀 주고 계시다.
이제 온 천하가 대개벽기를 맞이하였느니라. 내가 혼란키 짝이 없는 말대(末代)의 천지를 뜯어고쳐 새 세상을 열고 비겁(否劫)에 빠진 인간과 신명을 널리 건져 각기 안정을 누리게 하리니 이것이 곧 천지개벽(天地開闢)이라.
(증산도 道典 2:42:1~4)
이제 온 천하가 큰 병(大病)이 들었나니 내가 삼계대권을 주재하여 조화(造化)로써 천지를 개벽하고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선경(仙境)을 건설하려 하노라. 나는 옥황상제(玉皇上帝)니라. (증산도 道典 2:16)
지금은 선천 5만년의 시대가 끝나고 후천 가을 시대가 열리려고 하는 후천개벽기이다. 이때에는 우주의 주재자께서 이 땅에 강림하시어 하늘과 땅과 인간을 통치하는 대권[삼계대권]을 발동하시어 병든 천지를 뜯어 고치고 개벽기에 인류를 구원하여 후천 5만년의 조화선경세계를 건설하는 것이다.
상제님께서 “최수운은 내 세상이 올 것을 알렸다(도전 2:31:5).”라고 하셨다. 최수운의 사명은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오시니 그분을 잘 모셔야한다는 시천주侍天主의 길을 열어 놓은 것과 앞으로 후천 5만년의 무극대운이 열린다는 것과 괴질병겁이 이 땅에 엄습하여 후천개벽으로 새 세상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제님께서는 “수운가사는 수운이 노래한 것이나, 나의 일을 노래한 것이니라(증산도 道典 2:31).”하셨고 또 “수운가사에 새 기운이 갊아 있으니 말은 소장(蘇張)의 구변이 있고, 글은 이두(李杜)의 문장이 있고, 알음은 강절(康節)의 지식이 있나니 다 내 비결이니라(증산도 道典 2:32).”고 말씀해 주셨다.
동학 주문에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 하였으니 나의 일을 이름이라. 내가 천지를 개벽하고 조화정부를 열어 인간과 하늘의 혼란을 바로잡으려고 삼계를 둘러 살피다가 너의 동토에 그친 것은 잔피(孱疲)에 빠진 민중을 먼저 건져 만고에 쌓인 원한을 풀어 주려 함이라. 나를 믿는 자는 무궁한 행복을 얻어 선경의 낙을 누리리니 이것이 참동학이니라. (증산도 道典 3:184)
위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참동학은 2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기존의 동학은 진정한 동학의 의미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고 상제님의 가르침이 동학의 진면목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동학의 목적을 실현시켜 준다는 의미이다. 동학의 의미는 동방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상제님께서는 동방의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다.
언제든지 동쪽에서 먼저 일어나니 동으로 힘써라(도전 3:306:9).
상제님께서는 어디를 가실 때 항상 머리를 동쪽으로 먼저 두르시고, 동쪽으로 한 발을 내딛으신 뒤에야 비로소 다른 곳으로 향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5:420:1)
하루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서양이 곧 명부(冥府)라. 사람의 본성이 원래 어두운 곳을 등지고 밝은 곳을 향하나니 이것이 곧 배서향동(背西向東)이라. 만일 서양을 믿는 자는 이롭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2:120)
동방은 빛이 처음 비춰오는 곳이고 만물의 생명이 시작하는 곳이다. 더 나아가 역사와 문명이 새롭게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따라서 이번 개벽기에 인류를 구원하는 구원의 대도도 동방땅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제님께서 오시는 곳도 동방땅이며 무극대도가 나오는 곳도 동방땅이며 후천개벽기에 인류를 구원하여 신문명을 여는 장소도 동방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동학과 참동학의 진정한 의미인 것이다.
상제님은 무극을 주재하시는 무극상제이시다. 상제님께서는 “이제 말세의 개벽세상을 당하여 앞으로 무극대운無極大運이 열린다(도전 2:15:3).”고 하셨고 또 “무극대도無極大道를 세워 선천상극의 운을 닫고 조화선경造化仙境을 열어 고해에 빠진 억조창생을 건지려 한다(도전 5:3:3~4).”고 하셨다. 최수운이 “어화세상 사람들아 무극지운 닥친 줄을 너희가 알까보냐(용담가)”, “무극대도 닦아내니 오만년지 운수로다(용담가)”는 바로 증산상제님께서 여시는 후천 5만년 조화선경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이종도운移種道運 보천교 추수도운秋收道運 증산도
생장성으로 삼변三變하는 우주의 법도에 따라 상제님의 도운도 제1변, 제2변, 제3변 도운으로 전개가 된다. 앞에서 태모님께서 “나는 낙종落種물을 맡으리니 그대는 이종移種 물을 맡으라. 추수秋收할 사람은 다시 있느니라(도전 11:19:10).” 하신 말씀에서 살펴보았듯이 태모님께서는 벼농사에서 파종播種의 도수를 맡아 증산도 교단을 처음 개창하셨고 차경석은 이종移種의 도수를 맡아 일제 강점기에 600만명의 제1편 도운의 대부흥시대를 열었다.
1936년 차경석의 죽음과 함께 제1변 도운은 끝이 나고 제2변 도운이 열리는 1945년까지 10년간 휴식기를 갖게 된다. 이 10년의 기간은 제2변의 지도자가 성장하는 기간이다. 제2변의 지도자는 보천교를 토양으로 하여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된다. 1909년 1월 15일 부안 사람 이치화李致和가 백암리로 상제님을 처음 찾아 뵐 때의 상황을 『도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 때 상제님께서 방 안에서 내다보시며 “오랜만에 큰 일꾼 하나 들어오는구나.”하시고 치화가 인사를 여쭙자 마루로 올라오게 하신 뒤에 “이럴 때는 나이 적은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인사를 받느니라. 사배를 하라.”하시니라. 치화가 공손히 사배를 올리니 이번에는 치화를 앉혀 놓고 친히 단배單拜로 답하시고 거주성명을 물으시거늘 치화가 아뢰기를 “시생은 부안 사람으로 성은 李哥요, 이름은 영로榮魯, 자는 치화致和입니다.” 하니 상제님께서 “화和는 화禍와 같은 음이라. 사람은 복이 있어야 하나니 치화致和를 치복致福으로 하라.”하시며 친히 이름을 고쳐 주시니라.(도전 3:294:1~5)
이에 대해 『증산도의 진리』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37) 안경전 증산도의 진리, p665~667.
「상제님께서 이치복 성도를 ‘큰 일꾼’이라 하신 것은, 추수 도운을 여는 인물이 출세하는 데에 그가 결정적으로 기여할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이치복 성도는 차경석 성도의 전횡으로 성도들이 수부님 곁을 떠날 때 가장 나중에(1916년) 나와서 제화교濟化敎를 열어 포교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1918년 경에 안면도安眠島에서 존성은 안安씨요 성휘는 병炳 자, 욱彧 자이신 태상사부님(안운산 태상종도사님의 부친)을 만나 상제님 도를 전했습니다. 이후 태상사부님께서 보천교 신앙을 하시게 됨에 안운산安雲山 태상종도사님은 어린 시절부터 집에 드나드는 수많은 신도들이 나누는 도담을 들으면서 상제님 진리를 스스로 터득하셨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보천교를 신앙하던 안운산 태상종도사님은 해방과 더불어 정읍 대흥리에 남아있던 보천교 교당에 자리를 잡고 상제님의 대도사업을 시작하였다.38) 안경전 증산도의 진리 p668. 그 뒤 김제군 금산면 용화동에서 적극적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하여 수십만 명의 교세를 일으켜 증산도의 제2변 부흥시대를 여셨다. 차경석 성도의 호가 월곡月谷인데 이는 달이 나오는 골짜기란 뜻이다. 天地부모이신 상제님과 태모님의 무극대도는 日月의 생명을 가진 지도자에 의해 역사 속에서 작용을 하게 된다. 日月은 卦로는 坎離이고 오행으로는 水火이다. 水火는 水가 體가 되고 火가 用이 됨으로 상제님께서는 체용의 법도에 의해 물이 먼저 용사하게 하신 것이다.
6.25 전쟁으로 1954년부터 대휴게기를 선포하시고 20년을 지난 뒤 태상종도사님은 “갑을로써 머리를 든다(도전 6:109:6).”는 상제님의 말씀대로 1974년 태전(대전의 본래 명칭)에서 수화일체水火一體의 원리로써 제3변 도운을 시작하셨다. 증산도의 추수도운 시대가 비로소 열린 것이다.
증산도의 도운은 정읍 대흥리에서 시작된 1변도운의 맥을 이어서 태전에서 매듭을 짓는 것이다. 또 정읍 대흥리에서 보신 포정소 도수는 제3변 도운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 태전에 도정道政의 본부가 자리 잡아 추수도운을 준비한다. 또한 정읍에서 파종播種된 천하파종도수天下播種度數(도전 6:48:2)는 천맥阡陌도수에 의해 지구촌 곳곳에 뻗어나가게 된다.
Ⅴ. 결론
1860년 4월 5일 최수운 대신사는 우주를 주재하시고 통치하시는 상제님[天主, 한울님]과의 천상문답天上問答을 통해서 천명天命을 받고 동학東學을 창도하였다. 이는 『동경대전』, 『용담유사』, 『도원기서』의 곳곳에서 명백한 사실로서 확인된다. 그러나 2세 교주 최시형과 3세 교주 손병희에 의해 인격적인 天主는 비인격적인 존재로 왜곡되어, 내몸에 존재하는 것으로 변질되고 더 나아가 물물천物物天, 사사천事事天으로 더욱 변질되었다. 그 결과 지금의 동학신도와 연구자들은 동학을 창시한 수운의 본뜻을 따르지 않고 왜곡된 주장을 추종하고 있다. 이것은 동학의 근본 취지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수운선생의 근본 가르침은 이 천주를 올바르게 모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본 주문의 ‘시천주 조화정(侍天主 造化定)’의 참된 의미이다. 또한 앞으로 천주님께서 이 지상에 강세하여 ‘무극대도’를 열어 놓으신다고 하셨다. 무극대도는 무극제無極帝이신 상제님께서 직접 내 놓으시는 하느님의 대도이고 전인류를 구원하는 구원의 대도이며, 후천 5만년 조화문명시대를 여는 조화의 대도이고, 모순과 대립이 없는 상생의 대도이며, 모든 진리가 통일된 통일의 대도이고, 진리의 바탕과 진면목이 모두 드러나는 궁극의 대도이다. 수운선생은 후천세상이 열리기 전에 괴질이 지구촌을 엄습하고 모두 드러나는 궁극의 대도이다. 수운 선생은 후천세상이 열리기 전에 괴질이 지구촌을 엄습하고 나서 후천개벽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한울님을 잘 공경하면 죽을 염려가 없다고 하였다.
보천교를 창시한 교주 차경석은 이 땅에 오신 상제님을 모신 종도이다. 그와 그의 아버지는 모두 동학을 신앙하였고 1907년 5월 17일 상제님을 용암리 주막에서 처음 만났다. 그의 만인지장萬人之長이 될 만한 영웅적인 기개와 배짱을 높이 평가한 상제님께서는 그에게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을 노래하고 후천개벽을 학수고대하며 무극대운을 부르짖고 동학혁명에 참가하였다가 참혹하게 죽은 동학역신해원도수의 두령으로 삼으셨다. 그리고 또한 그에게 장군도수, 포정소도수, 왕자포덕도수, 천맥도수 등을 붙여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1변 도운의 개척의 사명을 맡기셨다.
그는 상제님이 붙인 도수사명에 따라 60방주제를 통해 포교해 진력하여 1921년 황석산 대천제에서 시국時國이라는 나라를 선포하고 보화교[보천교]를 창립하였다. 그의 신도는 600만에 이르렀고 간부교인만 55만 7천 7백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제의 강력한 탄압과 집요한 음해공작, 내부의 분란, 상제님에 대한 믿음의 와해, 그리고 무리한 건축공사 등으로 쇠퇴의 길을 걷다가 1936년 윤3월 10일 그의 죽음과 함께 보천교도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증산도 도운의 移種도운의 사명을 완수하여 제3변 도운의 토대를 쌓았다.
보천교 신도였던 안병욱 태상사부님을 따라 보천교를 신앙하던 안운산 태상종도사님은 해방과 더불어 정읍 대흥리에 남아 있던 보천교 교당에 자리를 잡고 대도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뒤 김제군 금산면 용화동에서 적극적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하여 수십만 명의 교세를 일으켜 증산도 제1변 부흥시대를 여셨다. 6.25 전쟁으로 1954년 대휴게기를 선포하시고 20년이 지난 1974년 태상종도사님은 수화일체水火一體의 원리로써 제3변 도운을 시작하셨다.
증산도는 동학에서 부르짖은 侍天主, 무극대도, 무극대운, 후천개벽, 병겁, 후천선경건설 등의 맥을 이은 참동학이다. 동학의 의미는 동방의 가르침이란 뜻으로 동방은 빛이 처음 비춰오는 곳, 만물의 생명이 시작되는 곳, 역사와 문명이 출발하는 곳, 개벽기에 인류를 구원하는 성소의 의미가 있다.
정읍 대흥리에서 시작한 상제님의 무극대도는 태전에 본부를 두고 추수도운을 준비한다.
대전대학교 윤창열 교수
보천교 학술대회: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산실, 보천교 재발견
2017년 11월 15일 수요일 국회 의원회관 2층 대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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